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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노재현시시각각

주먹시대 회칼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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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문화계에서 진보와 보수 성향을 각각 대표하는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민예총)과 한국예술단체총연합회(예총)가 며칠 전 한바탕 치고받았다.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산하 기관장 자진 사퇴’ 발언의 불똥이 두 단체에도 튀었다. 유 장관이 사퇴를 종용한 김윤수 국립현대미술관장과 김정헌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 한때 간부로 일했던 민예총이 먼저 분을 터뜨렸다. 17일 발표한 ‘완장 찬 유인촌 장관은 망언의 폭력을 멈추라’는 성명서가 그것이다. 성명서의 몇 대목을 보자.

‘현장 예술인 출신 장관 가면 뒤에 숨겨진 완장 찬 신종 홍위병의 극악함은…’ ‘유 장관의 주장은 교언영색의 극치에 다름아니다’ ‘이는 한평생을 천착해 온 예술인에 대한 폭력 행위며 예술계 전체에 대한 패륜행위다’ ‘낮술에 취하면 애비도 몰라본다는 옛말이 있다. 최근 유 장관의 모습은 권력이란 낮술에 취해 폭력의 칼을 휘둘러대는 망나니를 보는 듯하다’.

다음날인 18일 예총이 반박하고 나섰다. ‘문화권력의 퇴진을 강력히 요구한다’는 제목의 예총 성명서는 ‘권력이란 낮술에 취해 폭력의 칼을 휘둘러대는 망나니는 누구며, 오랜 세월 현장에서 헌신해 온 예술계 원로들을 자리에 연연하는 치졸한 인사들로 모독한 사람들이 누구인가’라고 꼬집었다. 민예총이 감싸고 돈 문화단체 간부들을 겨냥해 ‘겉으로는 그럴듯한 공모제의 모양새를 취하면서 실제로는 코드 나눠먹기의 음모를 자행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면서 ‘우리나라 문화예술계의 진일보를 위해 권력에 기대어 자리보전하는 예술가들의 퇴진을 요구한다’고 했다.

이렇게 팽팽히 맞설 때 진실은 대개 둘 사이 어디쯤에 묻혀있는 법이다. 민예총은 지난 10년간 코드 인사가 없었고 권력의 덕을 본 적도 없다고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예총이 1998년 이전의 좋았던 시절이 되돌아오길 바라지 않을 리 없다. 한나라당의 4월 총선 비례대표 국회의원 후보 신청자 명단에도 현 예총 회장의 이름이 올라있지 않은가. 그래서 어느 한 편을 들기가 어중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말’이다. 명색이 문화예술단체의 성명서인데 ‘극악함’이 무엇이고 ‘패륜행위’가 무엇인가. ‘낮술에 취해 폭력의 칼을 휘둘러대는 망나니’라는 표현은 도대체 누가 생각해냈는가. 이런 비문화적인 무뢰한의 얼굴이라도 한번 보고 싶다. 도종환 같은 괜찮은 시인이 민예총 부회장인데, 성명서 초안 한번 보여주지 않았다는 말일까.

75년 1월 12일 서울 명동의 사보이 호텔 커피숍에서 조직폭력배끼리 혈투가 벌어졌다. 호남파 30여 명이 명동 터줏대감이던 신상사파 20여 명을 덮쳤다. 이때 호남파가 생선회칼을 처음으로 동원했다. 그나마 협객티를 풍기던 전통적인 주먹싸움 시대가 끝나고 잔인한 ‘회칼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우리 문화계에도 기어코 회칼 시대가 찾아온 것인가. 적어도 성명서의 날 선 단어들만 보면 그런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깽판’ ‘양아치’ ‘통빡’ 같은 말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입에 올리던 전임 권력자의 그림자가 이렇게 길단 말인가.

예총과 민예총은 멀리는 60년대 문단의 ‘순수·참여’ 논쟁과 맥이 닿는 단체다. 순수문학을 옹호한 이어령의 ‘누가 그 조종(弔鐘)을 울리는가’와 이씨의 글을 반박한 김수영의 ‘실험적인 문학과 정치적 자유’ 같은 기고문(68년)을 보면 상대를 ‘그분’ 또는 ‘그’라고 칭하면서 시종 예의를 잃지 않는다. 아주 강하고 자극적인 표현이라야 ‘지극히 소아병적인 단견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는 정도다. 더구나 서로 상대방의 실명은 일절 언급하지 않으면서 논지를 펴고 있다. 말과 글의 격(格)에서 민예총 성명서와는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다. 안그래도 끔찍한 일들이 예사로 벌어져 신문 펼치기가 겁나는 요즘이다. 문화예술을 한다는 단체나 사람들마저 강파르고 표독한 언사를 일삼아서야 되겠는가. 이는 누가 옳고 그르다거나 누가 이기고 지는 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재현 문화스포츠 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