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책읽기Review] 지하철 노숙자 … 판잣집 아낙네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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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을지로 순환선
최호철 글·그림,
거북이북스,
176쪽, 1만8000원

한껏 차려 입은 아가씨는 옆자리 노숙자가 영 못마땅하다. 한가운데 남자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고, 그 뒤에 선 외국인 노동자는 물끄러니 창밖을 바라본다. 창밖엔, 산등성이까지 바글바글 올라간 판잣집들이 즐비하다. 아이업은 옥탑방 아낙은 빨래를 널고, 누나와 동생을 골목길서 세 발 자전거를 타며 마냥 즐거워한다. 가까이 지하철 안 사람들부터 저 멀리 판자촌 주민들까지…. 들여다볼수록 우리 모두가 주인공으로 떠오른다. 일터와 쉼터 사이를 긴 동그라미 삼아 돌고 도는 을지로 순환선 안팎의 풍경, 너무도 익숙한 우리네 생활반경이다.

최호철(43) 작가의 이야기 그림책엔 우리나라 수도 한 구석, 사람냄새 나는 장면 장면들이 담겨있다. 두툼한 스케치북을 메고 다니며 직접 밟은 땅과 직접 본 것들만 스케치한 최씨의 10여년 ‘그림 일기’를 모아 묶은 책이다. 이 ‘현대판 서울 풍속화’ 옆엔 작가가 촌철 살인의 한마디씩을 적었다. 판교 택지개발지구 그림엔 “피우지 못할 꽃 대신 돈이 자라나는 땅”, 출근길 교통체증으로 주차장이 되다시피 한 강변북로 위로 지나가는 전철을 그리고는 “시원한 강줄기 따라 꽉 막힌 롤러코스터, 서울 출근길”이라고 적어 넣었다.

만화냐 그림이냐. 아무려면 어떤가. 주변부 사람들을 애정 어린 눈으로 관찰하고 기록하는 작가의 손길에 공감할 수 밖에 없는 것을. 몇 년 간 고치고 또 고친 가로 22m 짜리 ‘을지로 순환선(그림)’ 최종본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며, 올 초 서울 로댕갤러리서 열린 ‘나의 아름다운 하루’전에도 나왔다.

권근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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