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랑방>藝總의 정치불개입 선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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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지금 나는 30여년전의 퇴색한 사진 한장을 유심히 들여다보고있다.64년 건립된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약칭「예총」.現 세종문화회관 자리)의 회관 준공식 사진이다.박종화(朴鍾和)회장이박정희(朴正熙)대통령으로부터 건네받은 회관 열 쇠를 높이 치켜든채 기뻐하고 있으며,그 좌우에서 대통령 내외가 흐뭇한 표정으로 박수를 보내고 있다.
이 사진의 상징적 의미는 매우 크다.쿠데타로 들어선 군사정권은 그들의 필요에 따라 61년말 모든 문화예술단체의 해산을 명한 다음 이듬해초 통합단일단체인 예총 창립을 주도했으며,회관 건립은 말하자면 문화예술의 정치권 예속을 알리는 한 신호탄이었기 때문이다.65년 제3공화국수립 경축예술제 개최를 시작으로 예총은 전천후(全天候)적 어용단체의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해왔다.한일협정.3선개헌.10월유신등 변혁기마다 지지성명을 내는 민첩성을 보였으며,5.17 이후에는 전 두환(全斗煥)씨를 대통령에 추대하는 성명을 발표하더니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취임했을때는 그를 왕건(王建)에 비유하면서 5共을 궁예(弓裔)의 폭정에 빗대는 발빠른 변신을 보이기도 했다.
그같은 예총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회장을 지낸 상당수 인사가 전국구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것도 우연한 일이랄 수는 없다.정치와 문화예술의「행복한 동반(同伴)」의 의미도 있다.하지만 예총창립의 첫번째 목적이「문화예술인 서로간의 친목도 모」라는 점에서 보자면 예총의 존재의미가 反문화예술적임은 확실하다.그것은 순수예술과 대중예술을 망라한 구성요소로서 잘 드러나고 있으며,때마다 협회간.계파간.파벌간 이해(利害)의 충돌로 불협화음을 야기해온 사실과도 무관하지 않다.
회관 건립 초창기의 웃지못할 에피소드들이 복합구조의 특성을 잘 드러낸다.시골에서 상경한 처녀들이 예총회관을 찾아와『배우 아무개,가수 아무개의 방이 어디냐』고 묻기 일쑤였고,거리의 악사들이 찾아와 회원으로 가입시켜 달라고 떼를 쓰는 일도 잦았다. 93년 새 정부가 들어선 직후 일부 예술인들이 예총 폐지론을 제기했던 것도 이제까지 예총의 위상과 관련해 그럼직한 면이없지 않다.자유주의국가중 이런 문화예술단체를 가진 나라는 없으며,게다가 정부지원으로 운영되고 있느니만큼 정치권 력에 대해 조금도 떳떳할 수 없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며칠전 신문 정치면 한귀퉁이에 예총이 경북김천에서 제12차 전국대표자대회를 열고『앞으로 어떤 경우에도 정치적으로 오해될 수 있는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對국민 결의문을만장일치로 채택했다는 기사가 보일듯 말듯 실렸다 .지방자치제 선거를 앞두고 느닷없이 왜 이런 결의까지 해야 했을까.물론 이제까지 정치권력의 시녀 노릇을 해온데 대한 반성의 의미일 수도있다. 그러나 곰곰 생각해보면 이런 행동 자체가 지금에 와서는별로 의미가 없다.만약 예총이 이제껏 해온 것처럼 정치권력에 대해 북치고 장구치는 행태를 되풀이한다면 그것은 정치권력의 안보에 도움을 주기는 커녕 오히려 표를 깎아먹는 결과로 나타나기십상이기 때문이다.정치불개입을 선언했다 해서 잘한 짓이라 박수를 쳐주는 국민도 없을 것이고,그런 선언을 하지 않았다 해서 나무라는 국민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차제에 예총의 존재 의미를 되새겨보고,만약 존재의 당위성이 발견된다면 어떻게 운영하는 것이 정치권력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한 순수예술단체로서의 기능을 회복하는 길인가를 연구검토하는게 더욱 바람직했을 것이다 .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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