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대장정>4.치타-凍土에 핀 공업.문화의 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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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치타는 아무르강 지류에 위치한 공업도시.몽고와 인접해 몽골리안들이 많이 살고 있으며 거리는 아직 소비에트의 흔적이 진하게 남아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화물칸에 몸을 실은 취재트럭은 닷새만에 치타에 도착했다.우리 일행중 4인의 트럭호송팀은 죄수호송차같이 어두컴컴한 횡단열차위 트럭탑에서 이제나 저제나 시간이 흐르기를눈감고 기다렸다.마치 닷새가 5개월,아니 5년처 럼 길게 느껴졌다. 오전8시 치타역에 도착한 우리는 전엔 치타공산당호텔이었으나 현재는 치타 주정부 소유의 호텔에 일단 여장을 풀었다.오랜만에 철창에서 풀려나온 새처럼 자유스러움에 온몸이 날아갈 듯했다. 얼어붙은 시베리아에 문화의 꽃을 피운 치타.아무르강 지류의 얼음이 풀리면서 이곳 나무에도 파란 새순이 돋기 시작해 동토에 움트는 강인한 생명력을 말없이 전해주고 있었다.
인구 36만2천명의 치타는 데카브리스트란(亂)의 좌절과 상실을 가슴에 담아 새로운 희망으로 꽃피워낸 곳이다.
12월 발발했다 하여 데카브리스트라는 이름이 붙은 이 난은 노불(露佛)전쟁에 참전했던 러시아의 젊은 장교들과 귀족의 자제들이 유럽 문물과 사상을 접한후 제정러시아 차르전제의 반민주성을 절감,귀국해 입헌군주제.공화제.농노해방 등을 부르짖으며 1825년 봉기한 사건이다.
차르의 겨울별장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의 동궁(冬宮)앞에서 봉기한 반란군과 이들을 진압하기 위해 출동한 차르의 군대는 혹한의추위속에 10여시간을 대치해야 했다.반란군들은 주모자중 한 사람의 밀고로 진압군의 말발굽에 짓밟혀 궤멸된다.
결국 아를리예프등 주모자 5명은 처형되고 나머지는 이곳 치타와 이르쿠츠크로 유배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훗날 「12월 당원의 반란」으로 불려진 이 사건은 비록 불발로 끝나고 말았지만 러시아 동토에 혁명의 씨앗을 심는 계기가 돼 이후 1917년 볼셰비키 혁명이 일어나기까지 무수한 혁명가들이 데카브리스트들의 뒤를 따르게 된다.
차르는 데카브리스트를 치타에 유배시키면서 반경 15㎞를 떠나지 못하게 했다.다만 그 안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생활을 보장했는데 이들 인텔리겐치아로 하여금 시베리아에 문화의 꽃을 피우게하려는 목적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치타에 있는 데카브리스트 박물관은 1770년대에 지어진 러시아 정교회로 못을 안쓰고 나무로만 건축한 것이 눈길을 끈다.이교회에서 유형수 아닌코프와 그를 사랑하며 이곳까지 따라온 프랑스 여인 볼리나 게벨이 결혼해 올랴라는 딸을 낳 았다.
후에 박물관으로 변신하면서 데카 브리스트들의 생전의 발자취가소중히 보 존되기 시작했다.
치타로 유배온 85명의 명단과 「12월당원의 난」을 지지한 시인 푸슈킨,『전쟁과 평화』에 등장하는 구트조프 장군,사형판결문,유배당해 올때 다리에 찼던 족쇄,동궁앞에서의 대치장면,주동자 아를리예프(사형)외 4명의 얼굴,교도소장 리파 르스키 등의그림과 기록등이 모두 전시돼 있다.
치타에는 모두 11명의 여자들이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와 집을짓고 살았다고 전해진다.
차르는 유배 30년이 되는 1855년 이들 유형수들을 모두 사면했는데 그때는 이미 할아버지가 된 뒤였다.
그러나 30년 세월이 지난 다음 사면이 되었다 하더라도 데카브리스트들의 유배지에서의 삶은 여전히 지도자적이었고 귀족정신을다치지 않은 품위있는 생활이었다.
때로 이들은 이르쿠츠크에 있는 동지의 집으로 가서 술잔을 나누며 나라걱정을 하고 국사를 논하기도 하는 그런 논객으로서의 시간을 보냈으며 차르도 그러한 모든 언행을 묵인하고 있었던 듯하다. 러시아는 참으로 묘한 나라다.인간성을 말살하는 숙청과 유형의 나라인가 하고 보면 실소를 머금게 하는 관대한 판관 모습도 보이니 말이다.
고르바초프를 실각하게 한 91년의 쿠데타 주모자들은 지금 모스크바의 대로를 활보하고 있다.그들의 재판이 있는 날마다 판사는 칭병을 하고 아예 병원침대에 누워버렸다지 않은가.
이들 데카브리스트들도 비록 족쇄를 차고 유형지에 왔을뿐 치타에서는 누릴 수 있는 모든 권위와 자유를 가졌던 듯하다.다만 거주 이전(移轉)의 자유만이 박탈되었을 뿐이다.
글.사진=김용범〈다큐멘터리감독.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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