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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인 걷기, 우리가 합니다!”

중앙일보

입력

머리 희끗해진 나이에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것은 근사한 일이다. 그것도 건강한 몸과 마음으로 길 위를 함께 누빌 수 있는 지기라면 더 무엇을 바랄까. 여기 환갑 즈음의 도보예찬자들이 있다. 함께 길 떠날 수 있는 친구가 있어 외롭지 않은 이들의 도보기행. 올해도 이들은 삼일절을 기념하기 위해 장장 120km에 달하는 길을 걸었다. 동국대 비서실장을 역임한 차준환(58), 대우건설 감리부장인 오세정(51), 디자인 회사를 운영하는 김월호(56) 외 다섯 명이 그들이다. 대부분 초중고교 선후배 사이로 인연을 맺은 그들은 이제 3년째 역사도보 활동을 하고 있으며, 역사적 기념일에 걷기 행사를 진행하려는 소망을 갖고 있다. 그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Walkholic(이하 WH) 무박으로 120km 씩 걷는 것은 일반인들에게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은데요, 어르신들 직업이 궁금합니다.
역사길 도보단(이하 역사도보) - 이제부터 우리들을 ‘역사길 도보단’으로 불러줘. (웃음) 역사 따라 걷는 길은 제 아무리 길어도 지루하지가 않아. 이번 역시 삼일절 기념주기를 맞아 천안에서 서울까지 무박으로 만세걷기를 했는데, 내가 생각해도 우린 참 잘 걸어. 그렇다고 운동을 전문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아니거든. 그냥 걷기가 좋아서 “그냥 열심히 걷는 거지, 뭐.” 이렇게 생각하면서 걷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야. 또 다들 직장 다니면서 제 할 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고. 자신의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면서 황혼을 함께 맞는 지기들인 거지. 나이가 있다 보니 걷기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건강한 친구들이지. (웃음)

WH 삼일절 기념 걷기를 생각하신 계기가 있는지요?
역사도보 - 젊었을 때부터도 건강과 명상에 치중해서 걷는 운동을 즐기는 편이었지.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부터는 조금씩 욕심이 생기더라고. 우리 후손들에게 뭔가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나’를 위한 걷기가 ‘우리’까지 생각하는 걷기로 조금씩 진화했다고 할까. 그렇다고 우리가 대단한 업적을 쌓아놓은 사람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같은 사람들의 역할도 중요한 것 아닌가? 기왕에 걷는 거, 후손들에게 쓸만한 자료를 남겨줘야겠다고 생각을 했지.
막상 시작을 하려고 보니까 어디서 시작해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긴 하더라고. 그런데 또 닥치면 다 하게 돼. 이제 하나둘씩 하다보니까 제법 요령도 붙었다고. 옛길을 걸으면서 자료 정리해놓고, 여러 걷기대회에 열심히 참가하면서 외국인 친구도 많이 사귀었지.
사실 3․1 만세운동처럼 우리 민족들에게 큰 의의가 있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서는 아주 신중해야 하고 가슴 깊이 남을 수 있는 감동적인 행사가 돼야지. 생각을 해봐요. 총칼을 앞세운 세력에 맞서 싸우는 일이 얼마나 두려웠을지. 민족의 독립을 위해 그 공포를 이겨내고 만세를 불렀다고 생각하면 나는 지금도 온몸에 전율이 생겨. 그런데 그런 숭고한 정신이 우리 기억 속에서 멀어져가고 있는 게 우리 현실이지. 삼일절이라고 해서 그날을 기리면서 눈시울을 붉히거나 그 의미를 곱씹어 보는 젊은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어? 우리세대까지는 그래도 태극기라도 대문에 달아놓는다고. 요새 젊은 사람들은 광란의 오토바이 질주 같은 것들로 기념하려는 모양인데, 그래서는 안 되지. 우리야 지금 아무런 힘도 없는 사람들이니까 잔소리로 밖에 안 들릴 테지만….
우리는 그저 말없이 걸었어. 120km 길이었는데 우리가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전해지길 바랄 뿐이지, 뭐. 언제가 많은 젊은이들이 우리 곁에 함께 할 거라는 꿈을 꾸면서 말이야.

WH 지금껏 다니신 길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해주시겠어요?
역사도보 - 삼일운동이야 전국적으로 다 전개됐지만 아무래도 독립선언 만세운동의 시발지인 서울 파고다공원과 유관순열사가 주도한 천안병천 아우네장터 만세운동을 빼놓을 수가 없지. 그러니까 그 두 곳을 이어 걷는 일이 우리에게는 아주 큰 의미가 있는 거고. 지금은 우리끼리만 걷고 있으니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좀 고독하게 보이기도 하겠지. 하지만 더 많은 젊은이들과 이 길을 걷겠다는 소망을 저버릴 수는 없지. 매년 삼일절이 되면 도보인파들이 거리를 메우는 상상을 한 번 해보라고. 얼마나 짜릿해? 아주 큰 상징성을 갖게 될 거야.
우리나라 도로의 모체인 1번 국토를 따라서 걷다가 정조대왕이 행차했던 길로 접어든 적이 있는데, 이 길도 역시 잊을 수가 없지. 비극적으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찾아 행차를 떠난 정조대왕의 심정을 헤아려보기도 하고, 역사 공부도 하고, 명상에도 빠지고.
삼일절 전날 오전 9시에 천안 병천 유관순열사 사우를 출발하면 다음날 오전 9시 정도에 서울 파고다 공원에 도착해. 사실 스물 네 시간 꼬박 걸리는 거리니까 아무나 나설 수 없긴 하지. 그래도 이렇게 나이 먹은 우리들도 했는걸. 가야할 길이 멀다고 겁먹을 필요가 전혀 없어. 삼일절은 일 년에 한 번 밖에 없잖아. 그만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도 전혀 아깝지 않은 날이고 말이야. 다 걷고 나면 정말 뿌듯해. 이런 소식은 외신은 타고 나가도 정말 자랑스러운 거잖아. 머잖아 그런 날이 꼭 오리라고 믿어. 정말 믿어.

WH 의지만으로 버티기 힘든 고된 도보길인 점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길에서 크고 작은 경험들도 많이 겪으셨을 것 같습니다.
역사도보 - 걷기 단체의 조끼를 얻어 입긴 했지만 보도용 행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원도 달랑 우리들뿐이었고 많이 외로웠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서 우리끼리 에스코드 차량도 마련해 함께 움직였는데, 그 차타고 빨리 갔다 오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긴 있었어. 그 사람들은 우리 생각해 주는 마음에서 한 말이겠지만, 우리는 사실 그런 말 들으면 힘이 쪽 빠져. 물론 정말 의미 있는 행사라고 격려해 주는 사람들도 많지. 평택을 지날 즘에 한 식당에 들러서 밥 먹고 발에 생긴 물집을 치료하는데, 거기 주인장이 내 가족처럼 우리를 걱정하면서 눈시울을 붉히더라고. 괜히 가슴이 찡하지. 수원에서는 대학생들을 만났는데, 다음에 꼭 같이 걷고 싶다고 말해주더라고. 아, 그런 말 들으면 기쁘지. 너무 기쁘고, 없던 힘도 막 새로 생겨. 사람들한테도 힘을 얻지만, 길가에 내걸린 태극기 물결도 정말 많이 힘을 줘. 꼭 우리를 응원하는 것처럼 펄럭이거든.

WH 앞으로 계획과 함께 참가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세요.
역사도보 - 올해까지는 외부에 알리지 않고 우리끼리 걸었는데, 선뜻 함께 하자고 행사를 넓힐 단계가 아니어서 그랬어. 우리가 걸었던 길이 역사적으로는 참 의미 있는 구간인데, 보행로로 다 연결이 된 건 아니거든. 공사 때문에 차도랑 인도 구별이 어려운 데도 있고. 위험요소가 많은 거지. 그래서 선뜻 함께 하자고 하기가 어렵더라고. 일단 우리가 먼저 걸어본 후에 개선할 점들을 철저히 파악하자고 생각을 했지.
천안과 서울을 잇는 걷기 축제가 생겼으면 좋겠어. 온 국민이 삼일절을 기리면서 풀코스를 걷거나 지역별로 릴레이 걷기를 하거나…. 우리가 걷는 게 그 초석을 닦는 일인 것 같아. 일본에 아주 유명한 릴레이 걷기 행사가 있는데, 그걸 능가하는 행사를 이뤄내는 것이 우리들의 목표야. 함께 하고 싶으신 분들은 언제든지 저희들 아지트(http://blog.daum.net/sksun)로 와도 돼. 작으나마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도보인의 온라인 공간이거든.
우리가 젊지는 않지만 요령도 있고 경험도 많잖아. 또 체력이야 젊은이들이 훨씬 앞설 테지만 열정까지 뒤지는 것은 아니거든. 우리를 한번 믿어 보라고.

객원기자 설은영 skrn77@join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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