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明洞 국립극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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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40대 이상의 우리 연극인들이라면 누구나 명동 한복판의 옛 국립극장에 얽힌 추억들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칠순을 바라보는여류 희곡작가 박현숙(朴賢淑)씨의 추억 한토막-.
대학 재학중이던 49년 가을,개교기념 연극공연으로 셰익스피어의 『햄릿』이 결정되고 그는 연출자 이해랑(李海浪)씨의 강력한추천으로 오필리아역을 맡게 된다.한국 초연(初演)의 작품이었고,공연장이 국립극장으로 지정되기 전의 시공관(市 公館)이어서 몹시 긴장했던 탓에 그는 첫공연중 2층 계단에서 굴러떨어지는 실수를 범한다.연출자와 단원들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으나 장내를 가득 메운 관객들은 실성한 오필리아의 정해진 동작으로 알고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 다는 것이다.
반세기 가까이 지난 지금도 朴씨는 그때의 일을 연극 한평생의생생하고 소중한 추억으로 되새기고 있거니와 명동 옛 국립극장에서의 공연에 참여한 경험이 있는 모든 연극인들에게 그 자리는 「영원한 마음의 고향」으로 각인(刻印)돼 있다.
최근 헐리느니,마느니로 논란이 돼온 명동 옛 국립극장은 일제(日帝)때인 1936년 일인(日人)들에 의해 건립돼 명치좌(明治座)란 이름의 공연장으로 활용됐었다.일제치하에는 영화.연극 공연 뿐만 아니라 연회.시국강연 따위의 장소로도 이용됐으나 해방후 국제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서울시 산하 시공관을 거쳐57년 6월 국립극장으로 정해지기에 이르렀다.국립극장으로 정해지고 난 뒤에도 한동안 제 구실을 못하던 중 58년 9월28일열린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장면(張 勉)부통령 저격사건이 발생해충격을 주기도 했다.
73년 장충동 국립극장이 개관할 때까지 10여년동안 국립극장의 이름으로 버텨온 명동 옛 국립극장은 턱없이 낮은 예산에 시설마저 노후해 제 기능을 다할 수 없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극인이라면 누구나 연(緣)을 맺고 싶어했던 까닭은 이 건물이 해방후 문화예술의 산실(産室)로서,혹은 무대예술의 메카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기 때문이다.
76년 이 건물을 인수한 기업이 기존의 건물을 헐고 새 사옥을 건축한다고 발표했을 때 문화계 인사들이 한결같이 반대한 것도 그 까닭이다.다행히 철거계획은 보류됐다지만 당시 총무처가 이 건물을 팔아넘겼던 만큼 정부 차원의 대책을 마 련하는 것이바람직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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