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4·15 민심 탐방] 1. 정말로 정치가 싫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5면

▶지난 주말에 내린 눈으로 뒤덮인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민심은 지금 그 하얀 눈 위에 정말 국민을 위하고 민생을 걱정하는 새로운 국회상(像)을 그리고 싶어한다.[연합]

꽃샘바람이 손끝을 시리게 하는 2월 23일 오후 3시. 조류독감의 파장이 채 가시지 않은 충북 음성군 대소면 미곡리 들판에서 수박(브랜드 다올찬수박)을 심기 위해 비닐하우스 설치 작업을 하던 두 농부를 만났다. 마을 옆 농장에서 조류독감이 국내에서 두번째로 발견돼 3만여마리의 닭이 살처분당해 주변 농민들이 아직 그 아픔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모습이었다. 하우스 설치 작업을 잠시 멈추고 새참을 먹는 판에 끼어 말린 문어를 안주로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눴다.

"세상에 차떼기가 뭐여. 열 받아서 한잔 더 해야 쓰겄네. 투표를 왜 해유, 다 도적놈들인디…. 한나라당이고, 열린우리당이고, 민주당이고 왜 국민을 못살게 혀."(김선규.54.미곡1리 이장)

"큰 소리 떵떵 치는 정치인들, 뒤가 구린 놈들이여. 도적놈 만들려고 선거해?"(윤조현.63.화훼농가)

이틀 뒤인 25일 오후 8시30분 경북 울진군 죽변항 끝머리 대게회센터. 직장 동료로 보이는 30대 후반 세 사람이 생선회를 안주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술이 거나해지며 대화가 정치권의 불법 선거자금과 총선거로 옮아가자 언성이 높아졌다.

*** 정치 생각하면 머리 아파

"야! 부인이 돈 받은 거를 몰랐다꼬? 그기 말이 되나."

"그렇지, 누가 받아도 마찬가지지. 다 같은 놈들이라카이."

"결국 다 그런데 투표는 뭐 할라꼬 하노."

"맞아. 젊은 친구를 찍어도 마찬가지다."

"허허! 그래도 젊은 사람이 낫지."

"야, 야! 됐다고마. 정치 얘기 그만 하고 술이나 마시자."

전북 부안으로 가는 길에는 지금도 '핵 폐기장 반대'라는 노란색 깃발이 나부낀다. 부안읍내 가게는 이 노란 천을 붙인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나뉘어 있다. 버스정류장에는 '베트남.필리핀 여성 맞선 주선'이라고 적힌 현수막이 걸려 있다. 터미널 옆 화장품 가게에서 그 집 주인과 바로 옆 정육점 주인을 함께 만났다.

"시위 막는다고 터미널 부근에 경찰 8000명이 펭귄처럼 서 있었으니 장사가 될 게 뭐여."

"정부가 핵 폐기장 문제를 확실하게 해결하기 전에는 투표 안 할 거여."

"어제 교회에서 누가 명함 주고 악수하다가 '뽑아주면 뭐하냐'는 사람들에게 무안만 당하고 갔어."

"맞어. 어디 즈그(자기)들 편하라고 뽑아주었나. 서민들 손을 잡아주어야지…."

정치권에 대한 불신과 냉소는 영남.호남.충청.강원 등 지역이나 농어촌과 도시가 따로 없다. 시장 상인이나 택시기사나, 젊은 대학생이나 나이 든 노인이나 마찬가지다. 그래도 투표를 해야 판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국회의원이 '나 ○○위원회 누구입니다'하며 전화를 걸어오면 또 용돈 필요한 모양이라고 여기면 됩니다. 이번 국회는 너무 썩었어요. 제가 번 돈이 아니고 도적질해서 쓰니까 가치를 모르고 그런 게지요."(강대권.광주시 하남공단 ㈜장호 회장)

"정치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옵니다. 세상이 너무 혼란스러워요."(이금희.충남 계룡산 동학사 입구 카페 주인)

*** 그래도 투표해야 바뀌지

"털어서 먼지 안 나는 사람 없겠지만, 말로는 민의를 대변한다면서 정작 주민들의 고충에는 귀기울이지 않고 자기 잇속이나 챙기잖아요."(최재웅.공주대 컴퓨터공학과 3학년 휴학)

"정부가 무능하고 무책임해요. 문제가 생기면 빨리 정리해야 하는데, 그릇된 판단을 하고서도 밀리면 안 된다는 생각에 밀어붙인다니까요."(김진원.45.핵폐기장백지화 범부안군대책위 조직위원장)

"정당보다 사람을 보고 투표할 겁니다. 공약은 척 들어보면 실천할 수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있어요. 높은 데 있는 사람들이 정신을 차려야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죠."(김선희.강원도 춘천댐 매운탕골 음식점 주인)

영남 하면 '한나라당 정서', 호남 하면 '민주당 정서', 충청도 하면 '자민련 정서'하는 식의 정당몰이와 지역정서도 엷어졌다. 정치인들은 너나없이, 굳이 당을 가릴 것도 없이 똑같다는 반응이다. 유권자들이 지역정서와 바람에 의존한 과거 선거의 폐해를 학습한 결과로 보인다.

*** "지역주의 엷어질 것"

"손님들이 모이면 그래요. 한나라당은 해 먹을 만큼 해먹었고, 열린우리당 찍어주면 너무 기(氣)를 살려주는 꼴이 될 거고, 차라리 무소속이나 민주노동당을 찍자고요."(고경영.울산시 달동 음식점 주인)

"정서적으로 여전히 민주당이 우세하지만 '미워도 다시 한번, 민주당'식은 아닌 것 같아요. 호남에서도 물갈이를 원합니다."(오탁순.전남 목포 한국병원장)

"충청북도도 이젠 자민련 판이 아니여. 전라도에서 DJ 보고 형님, 형님 하다가 돌아서는 것 보더라고."(윤조현.63.충북 음성 화훼농가)

이런 분위기에서 일부 지역에선 무소속 후보들이 대거 움직이고 있다. 대구 달서을 지역구에선 지난달 17일 세명의 후보가 단일화를 선언했고, 대구.경북 지역의 다른 후보자들이 '무소속 연대' 결성을 꾀하고 있다.

이만훈 사회전문기자, 양재찬 경제전문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