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호세상보기>북한의 말이 난폭한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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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그리스군이 철수하자 트로이군은 목마(木馬)를 성안으로 끌어들였다.왕녀 카산드라는 그것을 불태우라고 소리쳤으나 승리감에 도취한 트로이군은 아무도 그 말을 듣지 않았다.결국 그리스군의 내외(內外)호응에 의해 트로이는 멸망했다.북한이 한국형 경수로(輕水爐)를 거부하는 것은 그것이 트로이의 목마가 될 것으로「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가설(假說)이 있다.연인원 수천명의한국 기술자들이 경수로를 건설하기 위해 북한을 들락거리면 자유의 바람이 묻어들어 오고,이것이 북 한 주민들에게 전파되면 이윽고 북한 체제는 무너진다는 것이 가설의 기본 골격이다.
그러나 이 가설은 현실성이 희박하다.한국 기술자들은 자기 일을 놔두고 정치 프로파간다에 열을 올릴 처지가 못된다.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사장은 당장 그런 기술자를 해고할 것이다.또 고도로 통제된 북한 사회에선 원초적으로 그런 일이 불가능하다.역사적으로 봐도 동독이나 소련등은 스스로 무너졌지 외부 공작 때문이 아니었다.무엇보다 북한 지도자 자신들도 이 가설의非현실성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 북한은 왜 경수로 협상을 질질 끌까.바로 이 협상을 가교(架橋)로 삼아 서방자본을 도입,경제난을 타개하려는 의도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이 유력하다.얼마전 中央日報에 기고한 통일원 유인택(柳仁澤)박사의 추측이 그렇다.이 추측은 아주 그럴듯하다.10년 가까이 걸릴 원전(原電)2기 건설에 연연할 북한이아니라는 분석은 공감을 얻을만 하다.
북한의 의도가 성공하려면 이른바 북핵(北核)국면을 경협국면으로 전환해야한다.상당한 시일과 인내가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북한은 무엇으로 버틸까.외교적 기교가 그들의 버팀목이라는 것은 잘 안다.5년전 서방의 첩보위성이 영변(寧邊)원자로건설을 탐지한 이후 그들의 외교술수의 능란함은 익히 보아 왔다.그 다음은 무엇일까.혹시「말(언어)의 힘」이 아닐까.
그들은 유엔에서 대단한 언어폭력을 구사했다.핵금(核禁)조약 연장안을 토의하는 자리에서 미국 지도층을「통탄할 정치무식꾼」이라고 부르고,전략문제 전문가를「학자로서의 믿음과 견해도 없는 돌대가리」「더러운 쓰레기같은 말을 쏟아대는 사람」 등으로 불렀다.한국 쪽에 대곤「괴뢰 수괴」라는 말을 썼다.「외교는 가장 불쾌한(nastiest) 일을 가장 기분좋게(nicest) 말하는 것」이라는 통념에서 보면 이런 말은「외교파괴」에 해당될 것이다. 거친 말을 사용함으로써 자신을 스스로 강력하게 만들겠다는 그들의 언어 철학(哲學)을 짐작할 수 있다.72년 뮌헨 올림픽에서 세계 신기록을 수립한 사격선수가 『원쑤의 가슴을 쏘듯이 쐈다』는 소감을 말하면서부터 그들의 말이 거칠다는 사실을서방세계도 알게 됐다.최근 판문점 접촉에서 『서울은 불바다가 될 것』이라는 말도 했다.
말은 현상을 묘사하는 일상의 도구인 동시에 현실을 창조하고 삶을 유도한다.그들은 더 버티기 위해서라도 강력한 언어를 계속사용할 것이다.그들은 말의 힘에 의해 강력해지기를 바라는 것이다.그들의 폭언을 듣는 우리의 고단한 처지는 그 렇다 치고,조만간 다시 협상에 나서야 할 미국인들은 조심해야 한다.그들은『미제(美帝)의 각(脚)을 뜨자』는 말을 예사로 한다.미남 외교관 갈루치가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할텐데….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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