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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조백일장2월] “철로 보며 아버지 사다리 떠올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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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장원 유현주씨

입춘도 우수도 지나 어느덧 새봄의 초입, 2월 중앙 시조백일장에는 여느 때보다 두 배가 넘는 작품이 몰렸다. 내처 손수 시집을 엮어 보낸 이도 있었다. 그 치열한 경쟁 속에서 장원으로 선정된 작품은 인천 용현동에 사는 주부 유현주(42·사진)씨의 ‘사다리’다.

당선작은 지하철 철로를 사다리로 형상화한 것이다. 서울과 인천을 잇는 지하철 1호선 선로를 보며 어린 시절 가을이면 앞마당에 열리는 햇과일을 따던 아버지의 사다리를 떠올린 것이다. “어느 날 문득 보니 늘 타고다니는 지하철의 철도가 사다리를 계속 연결해놓은 모습이더라고요. 사다리도 길이잖아요. 하나의 물체지만, 가까운 곳을 건너 올라가는 길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의 당선은 이번이 두 번째다. 시조를 처음 접한 지 반년도 지나지 않았던 지난해 4월 두 번째 응모 만에 장원에 당선되기도 했다. “문학에 문외한”이라는 유씨는 “전문적으로 시조 수업을 받아 본 적도 없다”고 했다. 그저 시를 좋아하는 평범한 주부였던 그는 중앙 시조백일장을 접한 뒤 시조에 입문하게 됐다. “가끔 혼자 시를 긁적일 뿐인 저에게 백일장은 일종의 자극이자 도전이었어요.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용기를 냈어요.”

그가 말하는 최고의 시조 공부 방법은 “무조건 많이 읽고 써보는 것”이다. “처음에 시조집 다섯 권을 사다가 밤낮 할 것 없이 읽었어요. 읽다 보니 시조의 율격에 차츰 익숙해졌어요. 하지만 직접 써보지 않으면 자기 것이 되지 않잖아요. 그래서 그 다음에는 열심히 제 생각을 시조의 틀에 담아내기 시작했어요.”

유씨의 작품은 독학만으로 익힌 것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탄탄하다. 첫 번째 당선 때나 이번 당선 때도 심사위원들은 그의 작품이 지닌 매끄러운 구조와 참신한 상상력에 좋은 점수를 줬다.

전업주부라 해도 남편과 초등학생·중학생 아들 둘을 뒷바라지하는 유씨가 마냥 한가하지는 않을 터이다. “잠을 줄여가면서 시조를 쓰죠. 머릿속의 생각이 하나의 작품이 돼 딱 떠오르는 순간이 있는데, 그때 느껴지는 희열은 표현할 수 없을 정도에요. 그래서 옆에서 말을 시켜도 모를 정도로 몰입하게 돼요.”

요즘 그는 퇴고하는 재미에 푹 빠졌다. “전에는 많이 쓰고 그걸로 끝이었는데 지금은 작품 하나를 쓰면 곁에 오래 두고 다시 읽어요. 한글 사전을 펼쳐 놓고 단어 하나라도 더 감칠맛 나는 것이 없을까, 남들이 잘 안 쓰는 예쁜 우리말은 없을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죠.”

두 번의 당선을 “장님 문고리 잡은 격”이라 낮춰 말하는 유씨. 그러나 그의 비결은 우연히 찾아온 행운이 아니라 끊임없는 노력이다. 그는 당찬 포부를 밝혔다.

“당선 소식을 듣고 나니 가슴이 너무 뛰네요. 1차 목표는 연말장원이에요.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면서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절대로 도태되지 않을 거에요.” 

이에스더 기자


이달의 심사평

선명한 이미지로 일상의 경험 드러내

연극에서 ‘해프닝(happening)’이란 장르는 글자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즉흥적이며, 말보다는 시각·청각적 소재를 중요한 표현 도구로 삼는다. 이번 달 시조 백일장 앞으로 쏟아져 들어온 상당수의 작품이 바로 ‘해프닝’처럼 태안반도, 이천 냉동창고사고, 숭례문 화재 등 최근에 일어난 사건·사고에 관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대부분이 논리적인 연결고리가 부족했고 사건에 대한 파편적 묘사에만 골몰한 듯 보였다. 때로 별 의미 없는 말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작품도 많았다. 설과 대보름을 안고 있어 가슴 곳곳이 휘영청 해야 할 2월이거늘, 선자의 정신 그늘은 잿빛투성이다.

1952년 현대 음악가 존 케이지(John Cage)가 미국의 한 대학에서 강의를 했는데, 그가 강의를 한 곳은 사다리 꼭대기였고 그 내용은 긴 침묵과 춤이었다. 유현주씨의 ‘사다리’를 장원으로 뽑으며 떠오른 생각. 이처럼 좋은 시란 모호한 관념 따위를 구체적 사물에 비유하여 선명한 이미지를 창출해 냄으로써 생생한 일상의 경험으로 환치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길 하나 담에 기대있었다’는 부분은 깔끔하게 사물언어를 구사하고 있다. 자식을 대신해 어려운 세상 길을 건너주는 아버지의 이미지가 케이지의 무용처럼 선명하게 잡힌다. 다만 아버지의 삶을 연상시킬 부가적 이미지가 형성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오영민씨의 ‘다림질을 하며’는 다림질을 통해 밀고 당기는 부부의 관계가 수반에 꽂힌 꽃처럼 안정감이 있다. ‘속상한 남편 달래듯’ 주름을 펴는 행위와 ‘구김살 몇, 몇 개쯤은 잔정으로’여기며 사는 이중적 알레고리가 재미있게 맞아떨어진다. 무난하기는 하지만 주 소재 외에 주변소재의 활용에도 적극적이기를 바란다. 첫째 수와 셋째 수의 정서가 너무 비슷하다는 점도 유의하도록.

양희영씨의 ‘고목’은 첫수 초장을 혼잣말처럼 시작하는 친근함과 고목의 내면적 의미를 인간사에 비유한 점이 돋보였다. 소품에 만족하지 말고 문명에 발맞춰나가는 진취적 소재에 눈을 열어놓기를 바란다. 이번 달은 평소에 비해 투고량이 많았고 수능을 끝낸 고3학생들의 활발한 참여가 눈길을 끌었으나, 자유시나 사설시조 형식이 많았음에 아쉬움을 느낀다. 김인후·허주영·기다빈·윤혜진·박미자씨의 작품이 끝까지 논의되었음을 밝힌다. 

<심사위원: 이승은·홍성란>



응모 안내

  매달 20일 무렵까지 접수된 응모작을 심사, 매달 말 발표합니다. 응모 편수는 제한이 없습니다. 매달 장원·차상·차하에 뽑힌 분을 대상으로 12월 연말장원을 가립니다. 연말장원은 중앙신인문학상 시조 부문 당선자(등단자격 부여)의 영광을 차지합니다. 장원·차상·차하 당선자에겐 각각 10만·7만·5만원의 원고료와 함께 『중앙시조대상 수상작품집』(책만드는집)을 보내드립니다. 응모시 연락처를 꼭 적어주십시오.

◇접수처=서울 중구 순화동 7번지 중앙일보 문화부 중앙시조백일장 담당자 앞(100-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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