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공연하던 미8군 무대로 찾아온 그와 인사한 뒤 우리는 종종 만나게 되었다. 같은 화양연예주식회사 소속이었기 때문에 당시 서울 남영동에 있던 회사에서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많았고, 그렇게 얼굴을 익힌 뒤부터는 박 선생이 자주 나를 찾아왔다. 나중에는 아주 친해져 나는 막내 여동생과 함께 당시 충무로에 있던 그 분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휴대전화는 물론 없었고 전화도 흔치 않던 시절이니 불쑥 찾아갈 때가 많았다. 당시 박 선생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마치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오고 가는 길에 들르는 곳이 됐다. 심지어 박 선생이 외출한 새 태연히 그 집에서 중국음식을 잔뜩 시켜 먹고 놀기도 했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온 박 선생을 만나기도 했지만 선생이 아주 늦게 귀가하는 날엔 그냥 우리 집으로 내빼기도 했다. 그러면 “이 녀석, 오늘도 잔뜩 시켜 먹었구나”라며 환하게 웃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박 선생은 가까운 사람에게는 아주 격의 없이 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짓궂은 농담도 곧잘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에게만 그랬고 대부분은 그 분의 이미지처럼 점잖고 아주 얌전한 편이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박 선생은 밖에서는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박 선생은 술을 못 마시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술을 아주 잘 마셨다. 단 집에서 친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만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박단마·이해랑·이난영·현인·김정구·백설희 선배들과 공연할 때의 에피소드를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해주었다. 평소에는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한번 이야기 보따리를 풀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술술 쏟아냈다.
생각해보면 나는 박춘석 선생을 마치 큰오빠처럼 따르고 의지했던 것 같다. 나이가 여덟 살이나 위니 큰오빠 뻘이기도 했다. 나이 차가 꽤 나기는 했지만 둘 다 미혼이었으니 충분히 이성 간의 감정이 생길 수도 있었던 관계였으나 선생 역시 나를 철없는 막내 여동생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오랜 세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꽤나 짓궂어 박 선생을 많이 놀리기도 했다. 한번은 “결혼은 왜 안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젊어서 한 여자를 깊이 사랑했는데 그로 인한 상처가 너무 커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답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패티 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