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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꿈의여정 50년 칸타빌레 2. 나의 스승 박춘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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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나는 음악과 사랑에 빠졌고, 음악과 결혼한 사람”이라며 평생 독신으로 산 박춘석(사진) 선생은 젊은 시절 상당한 미남이었다. 후일 검정 뿔 테 안경과 독특한 헤어스타일이 그 분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지만 나는 박춘석 선생을 희고 고운 피부와 온유한 이목구비, 점잖은 인상의 그야말로 귀공자로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생김새만큼이나 성품도 부드럽고 얌전한 진짜 귀공자였다.

내가 공연하던 미8군 무대로 찾아온 그와 인사한 뒤 우리는 종종 만나게 되었다. 같은 화양연예주식회사 소속이었기 때문에 당시 서울 남영동에 있던 회사에서 우연히 마주칠 기회가 많았고, 그렇게 얼굴을 익힌 뒤부터는 박 선생이 자주 나를 찾아왔다. 나중에는 아주 친해져 나는 막내 여동생과 함께 당시 충무로에 있던 그 분의 집에 놀러 가기도 했다.

휴대전화는 물론 없었고 전화도 흔치 않던 시절이니 불쑥 찾아갈 때가 많았다. 당시 박 선생은 어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는데, 나중에는 마치 참새가 방앗간 드나들듯 오고 가는 길에 들르는 곳이 됐다. 심지어 박 선생이 외출한 새 태연히 그 집에서 중국음식을 잔뜩 시켜 먹고 놀기도 했다. 그러다가 집에 돌아온 박 선생을 만나기도 했지만 선생이 아주 늦게 귀가하는 날엔 그냥 우리 집으로 내빼기도 했다. 그러면 “이 녀석, 오늘도 잔뜩 시켜 먹었구나”라며 환하게 웃던 선생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박 선생은 가까운 사람에게는 아주 격의 없이 대하고 재미있는 이야기나 짓궂은 농담도 곧잘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마음을 터놓고 지내는 사람에게만 그랬고 대부분은 그 분의 이미지처럼 점잖고 아주 얌전한 편이었다. 어느 정도였냐 하면 박 선생은 밖에서는 술을 한 잔도 마시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도 박 선생은 술을 못 마시는 줄로 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 사실은 술을 아주 잘 마셨다. 단 집에서 친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만 술을 마셨다. 술을 마시면 박단마·이해랑·이난영·현인·김정구·백설희 선배들과 공연할 때의 에피소드를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해주었다. 평소에는 말이 없는 편이었지만 한번 이야기 보따리를 풀면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술술 쏟아냈다.

생각해보면 나는 박춘석 선생을 마치 큰오빠처럼 따르고 의지했던 것 같다. 나이가 여덟 살이나 위니 큰오빠 뻘이기도 했다. 나이 차가 꽤 나기는 했지만 둘 다 미혼이었으니 충분히 이성 간의 감정이 생길 수도 있었던 관계였으나 선생 역시 나를 철없는 막내 여동생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물론 그랬기 때문에 이렇게 오랜 세월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

나도 꽤나 짓궂어 박 선생을 많이 놀리기도 했다. 한번은 “결혼은 왜 안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젊어서 한 여자를 깊이 사랑했는데 그로 인한 상처가 너무 커 다시는 사랑을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농담인지 진담인지 모를 대답을 했던 걸로 기억한다.

패티 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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