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한국현대사>16.朴憲永 浮上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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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45년10월10일 평양의 「북조선 서북5도당대회」에서 박헌영은 사태를 완전 장악하게 되는데 이영.정백 등은 「분열주의자」로 비판당하고 박헌영의 권위는 확고해졌다.
그러나 45년말 박헌영은 또다시 시련에 봉착했다.공산주의자 내부의 파벌의식,박헌영의 무원칙한 인사정책,「계동열성자대회」 결정의 불이행 등으로 박헌영에 대한 반대가 다시 거세게 일었기때문이다.특히 박헌영이 자신의 직계로만 간부를 임명하고 정식으로 당대회를 소집하지 않자 이를 빌미로 반대파들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46년2월19,20일 서울에서 열린 「조선공산당 중앙 및 도당동지 연석간담회」에서 최고조에 달했다.55명이 참가한 첫날 회의에서 20명 정도가 박헌영을 지지했고,나머지는 비판적 입장이었다.
이날 회의에서는 당대회를 즉각 열어 박헌영중심의 중앙당을 개편할 것을 요구하는 주장이 거세게 제기됐다.
박헌영은▲몇 안되는 당간부들하고만 상의한 점▲인사를 적재적소에 하지 못한 점▲「박헌영 만세」가 시민대회에서 외쳐진 것 등에 문제가 있었음을 인정했다.그러나 박헌영은 「현 중앙이 무능하다.중앙을 신임할 수 없다」는 주장은 불평에 불 과하며 「당원의 전체 의사는 아니다」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또 당대회는 여러가지 사정으로 당장 열 수는 없지만 중앙에 맡겨주면 적당한때에 북쪽과 상의해 열겠다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결국 이 간담회를 통해서도 공산당 내부의 갈등은 해소되지 않은 채 중앙당에 반대파 간부 몇명을 보강하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이렇게 잠재돼 있던 내부갈등이 8월 들어 마침내 공산당의 조직분열로 치닫게 된다.46년7월말 북조선공산당과 조선신민당이통합,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자 이에 호응해 8월초 박헌영은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등 좌익 3당의 합당 을 추진했다.그러자 8월5일 反박헌영계열의 공산당간부 6인이 공개적으로 박헌영파의 독선적 태도를 비판하고 당대회 소집을 다시 주장했다.이러한 주장은 누적된 불만의 표출이자 새로 결성될 통합당에서주도권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었다.이때 의 중심인물은 강진(姜進).이정윤(李廷允)등이었다.
이에 대응,박헌영은 이들을 전격적으로 당에서 제명시킨후 남로당 결성에 나서게 됐다.이에 맞서 당에서 제명당한 강진 등이 당대회 소집을 고집,박헌영과 대립하자 조선공산당은 완전히 두파로 갈라졌다.좌익3당은 남조선노동당과 사회노동당으 로 분리돼 주도권을 다투다가 결국 사회노동당은 자진 해산됐다.11월24일박헌영은 남로당 결성을 계기로 좌익내부의 갈등을 마무리짓고 일원적 지도체제를 다시 확립했다.
물론 이 과정에는 蘇군정의 지원과 개입이 크게 작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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