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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韓人巨商들>2.북경 昌寧집단 일궈낸 石山麟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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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중국 영화 『패왕별희』(覇王別姬)에는 문화대혁명의 장면이 나온다. 이 영화의 압권은 화면 전체가 붉은색조로 가득한 가운데두 주인공이 성난 홍위병과 군중들에게 둘러싸여 말할 수 없는 수모와 린치를 당하는 장면이다.
베이징(北京)근교 창핑(昌平)공장 회의실에서 만난 석산린(石山麟.52)씨는 패왕별희는 못봤지만 그 장면의 어떤 부분보다 더 세밀하고 더 자세하게 문혁(文革) 「투쟁」을 묘사했다.
하얼빈공대(工大)핵물리학과 3학년이었던 石씨는 문화혁명이 최고조에 달했던 68년부터 2년간 적게는 수십명에서부터 많게는 수만명의 군중에 둘러싸여 4백차례 이상의 「비판」과 「투쟁」을받았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투쟁은 비판보다 강도 높은 「반혁명분자 의식화 작업」으로 집단린치까지 가해진다).신문지로 둘둘말은 고깔모자를 쓰고 끈이 목에 매달린 직사각형 골판지를 양손으로 잡고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반쯤 숙여야 한다.
골판지에 쓰여진 죄명은 「혁명을 반대하고 류샤오치(劉小基).
덩샤오핑(鄧小平)을 찬양했다」「린뱌오(林彪).장칭(江靑)을 비난했다」「한국 특무(스파이)다」등 54가지.
25세의 한 조선족 젊은이가 그렇게 유명해진 까닭은 그가 중국 전역에서도 가장 뛰어난 엘리트들이 모인다는 하얼빈공대 학생운동권의 핵심지도부였던 경력 때문이었다.
그는 선전.선동 전문가인데다 문장에 능해 하루 2만자의 격문과 대자보를 썼으며 베이징까지 진출,저우언라이(周恩來).장칭등당시 권력자들과 면담을 하기도 했다.
학생운동 최고지도자로서 얻게된 고급 정보와 타고난 지적호기심으로 여러나라 역사를 섭렵했던 그는 친한 친구들에게 소근거리며『린뱌오는 간신이다』『장칭은 서태후(西太后)처럼 나라를 망칠 ×』『남조선 이승만은 박사라더라』라고 한 얘기가 빌미가 돼 학생운동권 반대파로부터 「반혁명분자」라는 치명적 공격을 받게된 것이다. 70년초 1,2심에서 모두 사형선고를 받았다.그해 9월 黑龍江省 정부의 감형조치로 15년형이 확정되고 덩샤오핑이 완전집권을 선언한 뒤 1주일이 지난 79년 1월23일까지 9년간 옥살이를 했다.
25세부터 36세까지 그의 전반부 인생은 정치와 혁명과 좌절의 드라마다.
-85년 하얼빈市에서 「昌寧급수설비창」이라는 공장을 차리면서사업을 시작하셨는데 창업자본은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감방서 나와 복권된 뒤 바로 하얼빈상업대학에서 교수질을 했지요.정치엔 만정이 떨어지고 교수생활은 너무 밋밋하고 사나이 태어나 이름은 한번 날려야겠고….80년대초부터 중국은 개방풍조에 휩싸였어요.돈을 벌자는 생각을 했지요.
당시 조선산 명태가 인기가 있어 주로 방학때 북조선과 가까운해안도시에서 수산물을 직접 싸들고 黑龍江省 내륙으로 깊이 들어가 팔고,내륙의 가마니를 어촌에 내다파는 보따리장사를 했습니다.한 2년하니 70만위안(인민폐.우리돈 7천만원 )쯤 벌었는데아마 당시 한 개인이 그렇게 많이 번 사람은 중국에 별로 없었을 겁니다.』 일체 사유가 금지된 공산주의 중국사회에서 개인사업이 허용된 것은 덩샤오핑이 집권한 79년부터.개방.개혁바람이강풍으로 바뀌는 시점은 85~86년 어간이다.
대부분 성공한 개인사업가들은 당시 직업이 고위공무원이건 교수건 체면불구하고 1~2년간 보따리장사.편지봉투 만들기등의 아르바이트로 「뭉칫돈」을 만들었다.이 시기는 말하자면 중국 최초의자본가들이 「자본의 원시적 축적」을 하던 때다.
『내륙여행을 하면서 여관에 자주 묶게 됐는데 한결같이 건물 옥상에 급수용 물탱크가 있어요.그 큰 물탱크를 만드는 것도 힘들지만 옥상까지 운반.설치하는 비용도 얼마나 많이 들겠습니까.
85년에 「전자동기압식급수설비」를 개발했지요.지상이나 지하실에 설치하고 높이에 따라 수압을 자동조절해 각 층에 물을 뿜어올려주는 장치입니다.
국내 특허를 따고 바로 이 설비를 만드는 공장을 차렸던게 85년 6월이었습니다.昌寧집단(그룹)의 모기업인 셈이죠.
그때부터 돈이 벌리는데 바로 그해 2백20만위안이던 매출이 86년 1천12만위안,87년 3천4백70만위안,88년 8천5백90만위안,89년 1억6천만위안으로 연평균증가율 3백%를 기록했지요. 현재 전자동급수설비는 중국 전체 공급량의 60%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모질고 고통에 찬 젊은 시절은 40대가 되자 재운(財運)의 「수직상승」으로 바뀌었다.사업 시작뒤엔 모험과 결단은 있었으나 젊은 시절의 좌절과 내면적 갈등은 없었다.
그가 국제특허를 내지 못해 그렇지 80년대 후반부터 한국.미국.일본.유럽에서 없어지기 시작한 건물옥상의 물탱크는 그의 중국특허제품을 해외 업자들이 모방해 각 나라에 공급한 것이라고 한다. -전자동 급수설비를 스스로 개발했다는 말입니까.
『감옥살이 하면서 내가 한일은 독서였습니다.두가지 종류를 봤는데 하나는 마르크시즘.공산주의 이론을 꿰뚫는 일이었고,다른 하나는 핵물리학 전공자로서 과학.기술의 실용적 이용에 관한 책이었지요.
그때 유압기술을 깊이 공부한게 신품개발의 밑거름이 됐습니다.
』 그는 동창들이 중국 핵개발의 주역인 하얼빈공대 핵물리학과에수석입학한 수재다.石총재의 입에선 마르크스의 자본론.고타강령비판.미학론이 거침없이 흘러나오고 자본주의 경영이론과 첨단기술이자유자재로 피력된다.
-사업을 하시면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무엇이었습니까.
『어려웠다기 보다는 90년에 하얼빈市가 이런저런 트집을 잡아우리회사를 강제 인수했습니다.자기들이 직접 해보겠다는 거죠.훌훌 털고 정부의 간섭이 거의 없고 시장원리가 보장되는 경제특구로 공장을 옮겼습니다.
海南省의 海口市에 5억위안규모의 공장을 설립했고 이어 91년秦皇島,92년 北京.湖北省의 武漢공장을 차례로 세워 세를 떨쳤지요. 역시 큰곳으로 진출하니 여러가지 관료적인 간섭들이 줄어듭디다. 명성이 좀 나서 그런지 지난해 黑龍江省정부가 하얼빈市에도 공장을 다시 세워줄수 없겠느냐 하더군요.「90년 하얼빈市가 昌寧기업을 봉쇄한 것은 오류였다」는 사과와 함께 말이죠.그래서 하얼빈 昌寧공장이 지금 건설중입니다.』 石총재의 고향은 경남창녕군이방면초곡리.그의 조부가 국권침탈 이태후인 1912년에 만주로 이사했다.
회사이름을 지을 당시 「북방(北方)」「동아(東亞)」같은 거창한 제안이 많았으나 어머님의 뜻에 따라 昌寧이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石총재는 한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자기가 인상깊게 읽었던 책 3권을 소개해 주었다.
감옥시절에 위로가 됐던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을 청소년에게특히 권하고 싶다는 거고,기업하면서는 吉林대학에서 89년 펴낸「삼성.현대.대우 창업주 이야기」가 감명깊었으며,마르크스의 「자본론」도 현대세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그러나 자본론은 이론과 현실을 잘 구별해 보아야 할것이라는 충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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