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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쓰는한국현대사>15.6.25발발 돌아온 美방첩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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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미군방첩대(CIC)가 48년 한반도에서 철수한 후 그 빈자리를 49년부터 美중앙정보국(CIA)이 들어와 메우게 됐다.CIA 한국지부의 책임자가 명확히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48년초부터주한미군사령관 하지의 정치고문을 맡은 해롤드 노 블이라는 설이가장 유력하다.노블은 1903년 선교사의 아들로 평양에서 태어나 한국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그의 아버지는 배재학당의 영어교사로 이승만(李承晩)을 가르쳤으며 자신은 미국에서 교육을받고 1925년 돌아온 후 이화여 전에서 9년간 교편을 잡기도했다. 한국전쟁과 함께 다시 들어온 미군방첩대(CIC)는 대공관계에 있어 간첩을 체포하는 일 뿐만 아니라 간첩을 파견하고 심지어는 정치공작원을 북한에 파견하는 일까지 맡았다.전시중 CIA는 독립조직이 아닌 미8군사령부에 배속돼 CIC와 공동으로활동했던 것으로 여겨진다.CIC의 공작활동중 가장 흥미로운 것은 우연한 계기로 폭로된 휴전회담 밀사파견 사건이었다.이 공작은 CIC에 의해 비밀리에 진행됐으나 당시 한국군 특무대장 김창룡(金昌龍)이 이 사실을 인지,당사자들 을 구속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51년6월에 이르러 한국전쟁의 높은 전상률과 이에 따른 국내적인 전쟁반대 여론의 확산,그리고 소기의 군사적 목적이 달성됐다고 판단되자 미국은 휴전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당초 미국은이 전쟁이 중공의 주도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판단 하고 국무 요원 찰스 마샬을 홍콩에 파견해 비밀교섭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후에는 소련의 영향력을 고려,前소련대사이자 당시 프린스턴大 객원교수였던 조지 케넌으로 하여금 유엔주재 소련대사 야코브 말리크와 비밀협상을 수행토록 하고 이 협상이 성공함에 따라 51년 7월10일 개성에서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비밀교섭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현지의 미8군은 김일성(金日成)의 의중을 탐색하는 한편 그에게 휴전의지를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북한의 지도자들과 친교가 깊은 남한의 좌익계 민족주의자를 비밀협상요원으로 파견하기로 결정했다.이에 따라 前민주의원 최익환(崔益煥)과 前남로당 경북도당 간부였던 박진목(朴進穆)을 평양에 밀파했다.이 임무는 705CIC파견대에 맡겨졌고 존스대위의 주선에 따라 예비 교섭을 맡은 박진목은 51년7월,그리고 최익환은 그해 가을에 각기 강 화도 교동을 거쳐 월북해외상 박헌영(朴憲永)과 前서울점령사령관이자 사법상인 이승엽(李承燁)을 만나 종전을 협의했다.
한국정부에는 비밀에 부쳐졌던 이 사건이 특무대장 김창룡에게 노출됨에 따라 입장이 난처해진 CIC705파견대는 밀사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는 커녕 사실을 모르는 했다.북한에서 이 사건은박헌영.이승엽을 간첩죄로 숙청하는 빌미가 됐고 남한에 돌아온 박진목은 간첩죄로 실형을 받았다.또 최익환은 독립지사라는 점이참작돼 실형은 면했으나 박해를 받다 불우하게 죽었다.86년 4월에 비밀해제된 CIC의 문서「에이전트 리포트」는 박진목에 대한 사찰 결과를 5쪽분량에 걸쳐 기록하고 있다.51년 12월7일자로 801CIC파견대 요원 프랜시스 그린과 존 하지가 작성한 이 보고서는 박진목이 평양에 밀파돼 이승엽을 만났다는 사실이외에 「박진목은 CIC정보원으로 알려졌다」는 대목도 들어있다.이에 대해 박진목 씨는 93년 7월 월간『말』誌와의 인터뷰에서『그들의 자의적 판단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고 밝혔다.

<신복룡 건국대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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