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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황세희의몸&마음] 매맞는 여성의 심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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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단발머리 여학생 시절부터 돋보였던 A양의 미모는 여대생이 되면서 절정을 이루었다. 그녀가 지나갈 때면 남학생들은 설렘의 시선으로, 여학생들은 부러움의 눈길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런 그녀가 어느날 전형적인 마초 스타일의 남성과 사랑에 빠지면서부터 ‘매맞는 여성’으로 전락해 버렸다.

A양은 처음엔 당황해서, 조금 후엔 창피해서 맞는다는 사실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하지만 차츰 폭력에 익숙해지면서 어느날 벗에게 자신의 상황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당연히 친구는 경악했다. “그녀가 수시로 매 맞는다는 사실보다 더 기막혔던 점은 폭력에 대한 그녀의 무기력한 반응”이라는 게 친구의 고백이다.

정확한 지적이다. 정신의학적으로 ‘두 번 이상’ 반복되는 폭력, 특히 연인이나 부부처럼 동등해야 될 관계에서 일어나는 반복적인 폭력은 이미 서로간에 때리고 맞는 ‘병적인 관계’가 형성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의 폭력은 본능적인 공격성이 파괴적으로 나타난 형태인데 무의식에 존재하는 열등감이 자극될 때 폭발적으로 나타난다. 즉 열등감이 많은 사람일수록 사소한 일에도 심하게 좌절하고 불같이 화를 내면서 폭력적으로 변한다.

이들은 폭력을 휘두른 뒤 ‘역시 나는 형편없이 못난 인간’이라는 느낌에 시달린다. 따라서 ‘내가 그 정도로 나쁜 인간은 아닌데 순간 실수했다’는 식으로 잘못을 만회하려 한다.

흔히 금방 비굴할 정도로 싹싹 빌거나 다음날 선물 공세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이런 행동은 진실된 참회라기 보다 잘못을 덮으려는 수단이다. 진정한 반성은 폭력 재발 여부를 보고서만 판단할 수 있다.

폭력은 반복된다. 연애시절 단 한 번이라도 폭력이 있었다면 신혼 초 폭력을 경험할 가능성이 절반을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따라서 연인이나 부부 간에 발생하는 폭력 재발을 예방하려면 처음 발생했을 때 “반복되면 헤어질 것”이라는 단호함을 상대방에게 보여줘야 한다. 만일 그래도 재발한다면 이별이 해결책인 셈이다.

비록 때리지는 않더라도 욕설, 무시하는 발언, 협박 등은 폭력의 또 다른 형태 혹은 구타의 전 단계다. 따라서 대처법은 동일하다.

피해자 역시 정신의학적인 문제가 있다. 이들은 자긍심이 없고, 매사를 쉽게 포기하면서 인생을 무방비한 태도로 산다. 또 폭력을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태도가 상대방을 쉽게 폭력 가해자로 만들기도 한다.

A양도 정신치료를 통해 어릴 때 아버지가 어머니와 자신을 자주 구타했던 사실을 깨달았다. 자긍심도 없고, 폭력을 무디게 받아들였던 배경을 인식한 것이다. 자신의 문제점을 자각한 A양은 그와의 단호한 결별을 통해 마침내 매맞는 여성의 굴레를 벗을 수 있었다.

황세희 기자·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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