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발음보다 의사소통 중요 반기문 유엔총장을 보세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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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웬만해선 그의 목소리를 피할 수 없다. 지하철을 타도, TV를 켜도, 전화를 걸어도 들린다.

“디스 스탑 이즈 양재, 양재(This stop is Yangjae, Yangjae: 이번 역은 양재입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에도 어김없이 들려온 목소리의 주인은 제니퍼 클라이드(33). 아리랑 국제방송(www.arirang.co.kr) 라디오에서 여행정보 프로그램 ‘트래블 버그(Travel Bug)’를 진행하는 영어 방송인이다. 서울 지하철 1~4호선의 영어 안내 방송, 아이스크림 광고에 나오는 ‘써리 원(31)’의 목소리, 휴대전화의 영어 연결 음성, 미술관 리움의 영어 작품소개까지 모두 그가 녹음했다.

“가끔 깜짝깜짝 놀래요. ‘어디서 많이 듣던 목소리인데’ 하다가 뒤늦게 내 목소리란 걸 깨닫는 경우가 종종 있어요.”

지하철 안내방송은 한꺼번에 녹음하느라 꽤 고생했다. “하루종일 ‘디스 스탑~’을 반복하려니까 정신이 없었어요.”

제니퍼는 한국인 어머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국적은 미국이지만 한국에서 산 시간이 훨씬 길다. 한국어와 영어 모두에 능통하다.

“어려서 한국에서 국제학교에 다녔지만 아빠와는 영어로, 엄마와는 한국말로 대화했어요. 대학 졸업하고 서울에 눌러 살면서 한국말이 더 늘었죠. 이젠 영어를 까먹고 있어요.”

그는 미국 뉴욕의 파슨스 디자인스쿨을 마치고 한국에서 홍익대 미대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했다.‘트래블 버그’는 2003년 진행하기 시작했다. 국내 첫 영어 라디오방송인 아리랑라디오가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리기 위해 만든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청취자는 대부분 한국인이란다.

“방송중 청취자들이 게시판에 글을 올려주면 그 사연에 맞춰 즉석에서 대화 주제를 바꾸기도 해요. 아는 주제가 나오면 영어가 좀 더 잘 들릴 것 같아서요.”

자연스럽게 영어 이야기가 나왔다. 제니퍼는 최근의 영어 논란을 어떻게 볼까.

“저처럼 영어 방송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원어민처럼 발음할 필요가 있을까요. 의사 소통만 분명히 할 수 있으면 문제 없어요.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영어로 얘기하는 걸 들었는데, 발음은 별로지만 전달력은 아주 훌륭하더라고요. 한국인으로 태어났는데 발음 어눌한 걸 왜 부끄러워해요.”

그는 그동안 EBS를 비롯한 여러 매체에서 수능·텝스(TEPS) 등 각종 학습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영어 열기와 문제점을 동시에 지켜봤다.

“시험을 봐야하니까 살아있는 영어를 배우기 어려운가 봐요. 아주 쉽거나 어려운 시험용 단어를 배우니까 실생활에 꼭 필요한 단어가 소홀하게 다뤄지는 것 같아요. 틀에 박힌 문장으로만 이야기하는 사람이 많고요. 그래도 예전보다 영어 잘하는 사람이 많아졌어요. 배워야겠다는 의욕이 강하고, 외국인 접할 기회도 많아져서 그런가 봐요.”

그가 살아있는 영어 배우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비법을 소개하나 싶어 귀를 쫑긋했더니 프로그램 자랑이다.

“언어가 말로만 되는 게 아니잖아요. 생소한 뉴스만 전하는 CNN보다 이명박·노무현처럼 익숙한 이름이 들리는 아리랑 방송이 도움될 거예요. 한 단어씩 100%는 못 알아들어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짐작하기가 더 쉽죠. 그렇게 차근차근 재미를 붙여가면 저절로 늘어요. 이건 제가 주변 한국 사람들을 보면서 생생히 경험한 거예요.” 

홍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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