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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84. 베르사유 궁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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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베르사유 궁전에서 국립무용단의 춤사위에 맞춰 가야금을 연주하고 있는 필자. 주프랑스 한국문화원은 2007년 연하장에 이 사진을 썼다.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는 650석 규모의 아담한 오페라 극장이 있다. 나무만으로 지은 특이한 공연장이다.

수백 년 동안 바싹 마른 나무는 화재에 취약하다. 때문에 목재만으로 공연장을 건립하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재정이 어려웠던 프랑스 왕정은 가장 싼 재료였던 나무를 쓰기로 했다고 한다. 그런데 재료를 선택한 동기가 무색할 만큼 나무 공연장은 기막힌 소리를 만들어냈다. 여기에서 연주하는 사람들은 아주 황홀한 울림을 들을 수 있다.

나는 2006년 6월 이 기회를 얻었다. 국립무용단의 배정혜 예술감독이 한국과 프랑스 수교 120주년 기념 공연을 하러 가면서 나에게 가야금 연주를 부탁한 것이다. 공연 때마다 무대 뒤에 수십 명의 소방대원을 대기하도록 만드는 고풍스러운 나무들은 아름다운 울림을 선사했다.

그런데 이 좋은 울림 때문에 문제도 일어났다. 무용 공연에는 원래 타악기를 많이 쓴다. 특히 한국 무용은 사물이 반주하는 경우가 많다. 이 공연장에서 북·꽹과리·징·장구를 연주하니 울림이 커 무대의 벽이 눈에 보일 정도로 출렁거렸다.

오페라 극장장이 리허설을 보더니 “이건 안 된다. 소리가 폭력적이다”고 했다. 무용단에게는 모욕적이었을 법한 소리다. 그래서 내가 중재에 나섰다. “홀이 특이하기 때문에 보통 홀에서 하는 것처럼 하면 안 됩니다. 소리를 적당히 조절합시다.” 연주자들의 사기를 꺾지 않으면서 음향을 조금 줄이니 반응이 괜찮았다.

나는 자작곡 ‘비단길’ ‘밤의 소리’를 연주했다. 나무를 울리는 느낌도 좋았지만 공연 뒤 ‘보너스’는 황홀하기까지 했다. 연주를 마치고 리셉션이 열리는 ‘전쟁의 방’까지 걸어가는 궁전 내 통로가 너무나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관람 시간이 지나 한 명의 관광객도 없는 밤에 왕과 왕비가 쓰던 침실까지 둘러보는 경험을 언제 또 하겠는가. 왕의 방에서는 유명한 베르사유 궁전의 정원이 한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달밤의 정취를 즐겼던 왕이 된 기분이었다. 함께 있었던 당시 주프랑스 대사도 “처음 보는 프랑스의 풍경”이라며 감탄했다.

2006년에는 프랑스에 두 차례 갔다. 연초에 파리 세계문화의집에서 한 번 연주했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의 청중이 좋다. 그들의 반응은 뜨겁다. 그러나 가장 못 잊는 것은 문득 찾아온 한국인들이다. 물방울 화가로 유명한 김창열씨는 파리·베르사유 공연에 모두 청중으로 왔다. 전혀 모르던 사이였던 우리는 이때 예술적 교감을 나눴다.

우리가 같은 땅에서 태어난 예술가라는 사실이 내 마음을 더욱 뜨겁게 했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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