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해는뜨고 해는지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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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제2부 불타는 땅 꽃잎은 떠 물 위에 흐르고 (9) 밖으로 나온 화순은 허청허청 걸었다.
부끄러울 것도 억울할 것도 없었다.그런 일에 얼굴조차 붉히지않았을 화순이었다.전 같으면 제가 일어서서 치마 훌렁 걷어올리며,그래 여기다 그짓들을 했다,왜? 그렇게 소리쳐버릴 화순이었다.그런 일들에 얽매이며 살았다면 여기까지 흘러 오지도 않았으리라.이제 다 버려도 좋은 몸이라고,더 지탱할 무엇도 없다고 생각했기에,스스로의 몸에 칼질을 하듯이 자신을 내던지며 여기까지 온 그녀가 아니었던가.
문가에 켜진 붉은 종이등 옆을 지나 화순은 캄캄한 바다를 내려다보며 걸음을 멈추었다.어떻게 그렇게 살아낼 수 있었을까.푸석푸석 밟으면 발이 빠질듯이 무엇인가가 가슴 속에서 무너져내린다.이제 나는 그런 여자가 못된다.그것 또한 잃어 버린 나,내한조각이다.
그 남자 때문이겠지.화순은 길남을 그렇게 불러본다.그 남자.
그는 누구였나.나도 사람이 그리울 수 있다는 걸 가르친 남자였다.사람이 보고싶어서 서러울 수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내게 심어준 남자였다.이제 겨우 그걸 아는데,그 남자는 없다.
뒤를 돌아보았다.유곽에서는 여전히 웃음소리에 뒤섞여서 노래가흘러나오고 있었다.창으로 흘러나오는 불빛에 그 소리가 얹히며 밤은 은성하게 무르익고 있었다.누군가는 생각하겠지.저 불빛을 보며 눈을 흘기기도 하겠지.그래 잘났다,잘난 너 희들 잘 먹고잘 살아라,그렇게 짓씹으며 침을 내뱉기도 하겠지.저기서도 가슴에 피고름이 흐르고,사람이 그리워 눈물지어야 하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
바람이 불어와,그녀의 머리칼을 이마 위로 쏟아붓듯이 흩날리며지나갔다.캄캄하게 어두운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화순은 자신에게 자꾸만 고개를 젓고 있었다.그때 저벅저벅 발소리가 다가와 등뒤에서 멈췄다.
『하나코.』 그가 그렇게 화순을 불렀다.
『나 하야시다.모르겠냐?』 남산에 올라가 돌을 던지면 김가네집 아니면 이가네 집이라지만,일본에서 돌을 던지면 하야시네 집이겠지.그렇다고 이 남자를 모를 수가 없다.언젠가 하룻밤을 같이 한 남자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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