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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가운 車에 여성의 감성을 불어넣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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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은선(왼쪽)씨가 실내 디자인을 담당한 닛산의 컨셉트카 믹심. 이 차는 지난해 국제 모터쇼에 출품됐다. 유씨 옆은 닛산의 미래차 개발 책임자인 프랑수아 방콩.

소녀는 틈만 나면 스케치북에 무언가 그리곤 했다. 소녀는 대학(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에 진학했고 졸업 직후 2004년 일본에 홀로 왔다. 그리고 우뚝 섰다. 일본 닛산자동차 디자인센터에서 근무하는 유은선(27)씨다.

설을 앞둔 5일 도쿄(東京)에서 차로 한 시간 반 정도 가야 하는 가나가와(神奈川)현 아쓰기(厚木)시 닛산 디자인센터에서 유씨를 만났다. 마침 유씨와 함께 닛산에서 일하는 한국인 디자이너 5명도 자리를 같이했다. 모두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 선후배 사이다. 이들은 닛산에 온 이유를 묻자 한결같이 “실력으로 경쟁하는 닛산 시스템이 좋아서”라고 답했다.

유씨는 어릴 땐 순수예술을 하고 싶어 했단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할 무렵 실생활에 도움을 주고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분야로 방향을 돌렸다. “여성의 감성을 모든 물건 디자인에 접목해 보고 싶었어요. 특히 모든 테크놀로지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자동차를 디자인하는 데 빠져들게 됐죠.”

그는 디자이너의 영원한 키워드로 ‘사람’을 꼽는다.

“좋은 디자인은 소비자에게 즐거움과 만족감을 줘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좋은 디자인이라 할 수 없죠. 소비자의 라이프스타일과 기호ㆍ요구를 세밀하게 파악하는 게 중요합니다. 타깃 소비자를 얼마나 이해하느냐에 디자인의 성패가 판가름 나게 되죠.”

그는 지난해 닛산의 컨셉트카 ‘믹심(Mixim)’ 프로젝트 팀에 발탁됐다. 실내 디자인 담당자로서다. 입사 4년 만에 실력을 발휘할 기회가 온 것이다. 이 차는 지난해 미국과 독일 모터쇼에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외관보다 여성의 따뜻한 감성이 녹아 있는 인테리어가 눈길을 끌어 일본뿐 아니라 해외 언론도 앞다퉈 보도했다. 그는 모터쇼에서 유창한 영어로 디자인 컨셉트를 설명하는 역할도 했다.

유씨는 해외 진출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실력을 믿고 도전하라고 권했다.

“젓가락 문화의 섬세함 때문인지 한국인은 ‘세부 디자인(디테일)에 강하다’는 평을 들어요. 헤드라이트(전조등)의 윤곽선이나 인테리어 등 세밀한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한국의 디자인 교육제도가 훌륭할 뿐 아니라 개개인 능력도 뛰어납니다. 디자이너에겐 언어 장벽을 이겨 나갈 ‘디자인’이라는 언어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돈과 시간을 투자해 유학을 가지 않아도 한국에서 충분히 실력만 쌓으면 얼마든지 해외 일자리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는 특히 디자이너 분야에선 여성의 성공 가능성이 높다고 강조했다. 여성은 색다른 감성으로 사물을 이해할 수 있는 강점이 있기 때문에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고 도전하면 얼마든지 남성을 앞설 수 있다는 것이다. 입사 3년차인 민아영(26)씨도 “능력 위주로 평가하는 외국 회사의 디자인 계통에서 일하면 여성에게 기회가 많다”며 “프레젠테이션도 일반적으로 여성이 훨씬 잘한다”고 거들었다.

유씨의 한국 차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그는 한국에서 새로운 차가 나오면 관심을 갖고 본단다. 그가 지적하는 한국 자동차 디자인의 문제점은 디자이너가 아닌 경영진이 디자인 컨셉트를 좌우하는 풍토다.

“한국 차 디자인도 앞뒤 조화나 균형감각은 세계적인 수준에 이르렀죠. 하지만 모든 차 디자인을 관통하는 ‘아이덴티티(동일성)’ 정립은 아직 멀었어요”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다 2004년 닛산에 온 최정규(32)씨는 “닛산 인피니티의 경우 멀리서 봐도 알아볼 수 있는 디자인의 동질성을 갖고 있습니다. 디자인은 디자이너에게 맡긴다는 기본에 충실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죠” 라고 부연 설명했다.

유씨는 일본말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채 닛산에 왔다. 처음엔 언어 장벽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를 더 힘들게 했던 것은 한국과 다른 일본인의 사고방식이었고 한다. “한국인은 정(情)이 많은 반면 일본 사람은 개인적이에요. 입사 이후 첫날 간단한 인사 이후엔 아무도 말을 걸거나 회사 생활에 대해 알려주려 하지 않아요.”

유은선(맨 오른쪽)씨와 한국인 동료 디자이너들. 유씨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운한·민아영·허용준·최정규·박준모씨.

닛산 디자인실에서 한국인으로는 가장 연장자인 박준모(38)씨도 “입사 초 이런 분위기가 너무 힘들었다"며 "퇴근 이후에 혼자 있는 것이 외로워 밤에 다시 회사로 돌아가 일을 한 경우도 있다"고 씁쓸해했다. 박씨는 GM대우자동차에서 7년간 일하다 2005년 닛산으로 옮겼다.

그는 “유럽 최고로 꼽히는 영국 왕립디자인학교(RCA)에서 교수들이 한국 학생에게 배우는 경우도 있다"며 "막연한 유학보다는 해외 일자리를 찾는 게 현명하다"고 말했다.

유씨는 이제 일본 풍토에 어느 정도 적응하게 됐지만 가족·친구와 떨어져 있다 보니 외로움을 타는 게 여전히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결혼하면 어떻겠느냐는 질문엔 “자동차 디자이너를 그만둬야 한다면 결혼을 포기할 것”이라고 단호히 답했다.

닛산엔 유달리 한국인 디자이너가 많다. 전체 자동차 디자이너는 110명 중 11명이 한
국인이다. 그렇다고 닛산이 외국인 디자이너를 많이 채용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을 포함해 전체 외국인은 16명에 불과하다. 닛산에 한국인 디자이너가 많이 진출한 것은 실력 위주의 채용 방식 덕분이다. 2000년 프랑스 르노가 닛산을 인수한 뒤 해외의 우수한 디자이너 스카우트에 나서면서 손기술 좋은 한국 디자이너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2002년 한국인 디자이너로는 처음으로 닛산의 문을 연 이운한(31)씨는 현대자동차 디자인실 출신이다. 현대차에선 신입사원이다 보니 층층시하에 가로막혀 신차 디자인은 엄두도 못 내고 1년간 서류 작업만 하다 능력 위주로 디자인 기회를 주는 닛산의 문을 두드려 입사했다. 이씨는 입사 이후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인 ‘캐시카이’와 세단인 ‘인피니티 EX’의 외관 디자인을 맡아 실력을 뽐냈다. 지금은 컨셉트 카 디자인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유씨는 “닛산이 한국인 디자이너에게 크게 만족하는 것 같다”며 “특히 발상과 스케치가 뛰어나 3∼5년 뒤 나올 선행(先行) 차량 디자인에 한국인 디자이너를 많이 활용한다”고 설명했다. 닛산은 2005년 홍익대와 산학협동 프로젝트까지 만들어 매년 한두 명을 채용하고 있다. 4월에도 홍익대 산업디자인학과 후배가 신입사원으로 들어올 예정이다.

BMW의 크리스 뱅글, 아우디의 발터 드 실바, 재규어의 이언 칼럼. 2000년대를 이끌고 있는 세계 3대 자동차 디자이너다. 유씨는 디자이너로서 완숙미를 갖추게 될 10년쯤 뒤엔 이들과 버금가는 자동차 명디자이너 반열에 오르겠다는 꿈을 품고 있다.

아쓰기(일본)=김태진기자
tj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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