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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란 무대에서 가장 열정적인 배우 박정자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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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호 12면

연극배우 박정자씨의 무대를 보러 가는 길에 소설가 박완서씨가 떠올랐다. 정확히는 선생의 주름이다. 지난가을 신작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가 출간됐을 때 이곳저곳에 인터뷰 사진이 실렸다. 희수(喜壽)의 작가는 양 볼 가득 미소 짓고 있었는데, 눈가 주름살이 활짝 펼친 아코디언 같았다.

아코디언은 77년의 희로애락을 수줍게 연주하고 있었다. 그 나이에 무슨 즐거움이 있을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여전히 쓸 게 많았고, 쓰고 있었다. 박정자씨도 그랬다. 그 많은 세월이 지났는데, 여전히 보여 줄 게 많았다. 온몸으로 내뿜는 삶의 이력이 무대를 꽉 채우고 있었다. 막이 내릴 때 아코디언이 춤을 췄다.
여자는 육십에 꿈을 발견했다
회색 코트 안에 진한 남색 셔츠를 입고 그가 나타났다. 노란 갈색 파마 머리가 멀리서도 눈에 띈다. 공연 중인 뮤지컬 ‘19 그리고 80(3월 5일까지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문의 02-580-1300)’의 극중 배역 ‘모드’에 맞춰 염색한 것이다. 단골이라는 서울 청담동 박재원 의상실에서 만난 박씨는 사진 촬영을 위해 옷부터 갈아입었다.

“(사진이) 어둡게 나오면 안 되니까.” 이어 보이는 눈웃음에 긴장이 탁 풀렸다.
목소리 때문이리라. 전매특허인 그녀의 목소리는 중후한 위엄으로 사람을 압도한다. 40여 년 연기 생활 동안 소위 ‘성격파’ 배역이 많았던 한 이유다. 대표적인 게 ‘신의 아그네스’의 수녀원장 리빙스턴 역. 2001년 ‘에쿠우스’ 공연 땐 국내 최초로 여자 다이사트(정신과 의사)를 연기했다.

1980년대 초 화장품 브랜드 ‘헤레나 루빈스타인’의 광고 음성은 지금도 회자되는 ‘명품’이다. 암흑 속에서 울리는 듯한 준엄한 목소리로 “여성의 아름다움은 과학으로 만들어진다”고 읊었다. CF 얘기를 하니 “얼마 전에도 엘리베이터에서 목소리를 듣고 ‘어, 헤레나 루빈스타인?’ 하는 사람이 있더라”며 깔깔 웃는다.

화사하게 웃는 모습은 천상 ‘모드’다. ‘19 그리고 80’의 모드는, 적어도 한국에선 박정자와 동일어다. 2003년 처음 모드를 연기한 이래 거르지 않고 공연에 참여해 왔다. 올해는 뮤지컬로 첫선을 보였다. “박정자 너마저 뮤지컬이냐 하는 소리도 듣지만, 관객은 항상 변화를 바라잖아요. 배우는 거기에 맞춰 다른 모습을 보여 줘야 해요. 예술 한다는 생각, 나 진작에 떨쳤어요.”

고정 레퍼토리를 갖는 배우가 흔치 않은 현실에서, ‘모드=박정자’란 브랜드는 본인 말대로 “대단한 축복”이다. 축복은 예순셋에 왔다. ‘19 그리고 80’을 처음 하면서 ‘꿈이란 게 60 넘어서도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단다.

“그전까지 예순넷에 죽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딱 그 나이면 더 이상 밉지도 늙지도 않을 것 같았거든요. 하지만 이젠 모드 나이가 될 때까지 이 극을 하겠다는 목표가 생겼어요. 뮤지컬로든 연극으로든 2년에 한 번씩 할 생각이에요. 그럼 이번을 포함해 음, 일곱 번 남았네요.”

20대 때부터 노역 연기를 해온 그녀에게 80이란 나이는 낯설지 않다. 달라진 것은 배역과 실제 나이의 간극이 좁혀지고 있다는 것. 지난 공연 때까지 관객의 탄성을 자아내던 극중 물구나무서기도 이제 힘에 부친다. 그래도 나이 드는 게 서럽진 않다.
“연극엔 인간의 모순과 갈등이 녹아 있고, 연기는 나이를 먹었을 때 자연스럽게 와요. 이제 생길 것은 주름밖에 없지만, 감사해요. 시간이 주는 선물이자 역할을 통해 얻은 훈장이니까요.”

‘모노드라마 박정자’의 박정자
뮤지컬 현실에 대한 얘기로 접어들자 박씨의 목소리가 커졌다.
“극장은 많아도 뮤지컬 할 만한 곳은 많지 않아요. 무대장치니 오디오 시스템이니 기술적인 면이 너-무 떨어져요. 그래도 배우들을 보면 참- 열심히 해요. 참- 예뻐요. 일찌감-치 나와서 몸 풀고 발성 연습하는 걸 보니 거.기.에. 뮤지컬의 미래가 있다 싶어요.”

마치 대사를 읊듯 강조하는 대목에선 장음과 스타카토를 섞었다. 손짓도 힘찼다. “대관 문제로 극장 리허설을 이틀밖에 못 했어요. (눈썹을 찌푸리며) 이-런 연-습은 있을 수가 없어. 이렇다니, 아-직-도!”

이것은 한편의 모노드라마다. 박정자가 연기하는 ‘모노드라마 박정자’. 리드미컬한 말투, 살짝 청중을 흘기는 듯한 눈빛, 때로 소녀처럼 발그레 미소 짓고 때로 여장부처럼 박장대소하는 저 웃음. 호흡은 가팔라졌고, 손짓은 격렬해졌다. 박정자에 빠진 박씨는 열정적으로 ‘대사’를 쏟아냈다.

“앞으로도 하고 싶은 것 많죠. 예컨대 음, 시카고? 거기서 마마 역. 올해 다시 한다는데 나, 하고 싶어. 또 빌리 엘리어트. 영화로 잘- 봤거든요. 뮤지컬이 지금 런던에서 인기 많다는데, 그 할머니 역을 꼭 하고 싶어요. 그래서 (한 손으로 입을 가리는 시늉을 하며) 소문 내고 있어요. 그렇게 최면을 거는 거지. 아이, 그럼 탭 댄스를 춰야 하는데, 나 배울 수 있을까?”

“호호, 내가 좀 표현이 과하죠? 사람들이 날더러 그래요. 행복할 땐 그 누구보다 행복한 듯하고, 불행할 땐 그 누구보다 불행해 보인다고. 그런데 나 정말 모드처럼 늙고 싶어요. 이 극에 ‘유기농’이란 말이 자주 나오잖아요? 날더러 요즘 유기농 할머니라고 하는데, 나 정-말, 무공해 인간이 되고 싶어요.”

“지난해엔 이 공연을 못 했죠. ‘신의 아그네스’ 개막 전날 발을 헛디뎌 심하게 다쳤거든요. 아프다는 생각보다 공연 어떡하지 생각뿐이었어요. 다음날 공연 때 얼굴에 온통 반창고를 붙이고 성치 않은 몸으로 하자니 대사가 콱 막혀 결국 대본 들고 했어요. 커튼콜 때 손숙이 해명해주니, 관객들이 뜨겁게 박수를 쳐줬어요. 그런 게 연극의 매력이죠. 그 뒤로도 무대에 설 때마다 떨림이 오는데, 아마 다시는 ‘신의 아그네스’ 못할 것 같아요. 죽음보다 더한 굴욕이죠. 배우로서 죽음은 사치예요. 그 순간만큼은 차라리 가루가 돼 날아갔으면 했어요. 배우한테 무대란 그런 것이죠.”

배우 인생 한길 "아직도 표 팔러 다녀"
연기자 박정자의 공식 이력은 1963년 동아방송 전속 성우로 입사하면서다. 대학 연극부로 거슬러 올라가는 연기 인생엔 연극·연출계에 굵은 족적을 남긴 오빠 박상호씨의 영향이 크다. 본격적인 배우 활동은 66년 극단 ‘자유’의 창립 멤버로 합류하면서부터. 이병복 대표의 깃발 아래 김정옥 연출과 나옥주·김용림·윤소정·최불암·김혜자 등 기라성 같은 연기자들이 뭉친 ‘자유’는 박정자를 키운 요람이자 우주다.

‘그 여자 사람 잡네’ ‘피의 결혼’ ‘웬일이세요 당신’ 등 화제작을 뿌리던 중 전환점이 된 작품이 86년 ‘위기의 여자’. 임영웅씨가 연출한 이 작품에서, 박씨는 강인한 카리스마로 요약되던 기존 캐릭터에서 180도 변신, 흔들리는 중년을 완벽하게 연기했다. 본인 표현으론 “배우로서 내 나이를 찾은 계기”였다. 이후 ‘엄마는 오십에 바다를 발견했다’ ‘신의 아그네스’ ‘페드라’ 등 숱한 문제작에서 천의 얼굴을 과시해 왔다.

자타가 공인하는 대한민국 여배우지만, 명성에 비해 금전적 보상은 미미하다. “차마 개런티를 밝히기 부끄럽다”고 쉬쉬할 정도다. 얼마 전 이종 조카가 타던 차를 물려받았을 땐 “내가 그래도 한국 대표 여배우인데” 하며 헛웃음이 났단다. 연극인 복지재단 초대 이사장(올 5월 임기 만료)으로 활동하면서 주력한 사안도 연극인기금 마련이었다.

그녀는 요즘도 표를 팔러 다닌다. 가방에 수십 장씩 쟁여 놓고 만나는 사람마다 연극 보러 오라고 권한다. 단지 제작비를 회수하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라이브로 연기를 하는데 관객이 없다는 건, 존재감이 너무 슬프잖아요. 요즘은 표 100장씩 사주는 소그룹을 모으는 중이에요. 기업도 접대비를 술이나 유흥이 아니라 문화에 쓰게 하면 얼마나 좋아.”
“혹시 ‘무릎팍 도사’ 같은 예능 프로 출연은 어때요?”라고 묻자 갑자기 어린아이처럼 들뜬 표정이 됐다.

“오, 그거 재미날 것 같다. 얼마 전 박세리 나왔을 때도 딸이랑 참 재미있게 봤어요. 나, 나가도 될까? 재미없진 않을까? 연극 홍보 위해서라면 뭔들 못 할까.”
“배우는 무대 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래서 학력 위조 파문으로 활동을 중단한 후배 윤석화의 불행을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한다.

“내년쯤, 나·손숙·윤석화 셋이서 무대 만들려고 해요. 올해 하자고 했는데, 석화가 아직 이르다고 꺼리더라고요. 대신 ‘정미소’(윤석화가 대표인 극단)에서 뮤지컬 제작 돕고 있대요. 요즘 아이 키우는 재미에 빠진 것 같아. 나도 아이 둘 키웠는데, 만삭일 때도 한번도 (무대를) 거른 적이 없어요. 내가 열심히 해서 약 올려줘야지. 아니면 내가 너무 외로워요. 라이벌이 있어야 긴장감이 생기잖아요.”

축제처럼 죽음을 맞이하고파
19세 청년에게 인생의 지혜를 일러주고, 인간애를 넘어선 사랑을 교감하는 모드로서, 그녀는 숱한 신진 배우들과 연기해 왔다. 사랑에 빠진 귀여운 할머니 모드에 ‘여자’ 박정자가 겹치지 않을 리 없다. 수십 년 연하남과의 핑크빛 루머에 대해 물으니 당황하지도 않고 예의 그 청아한 웃음으로 받아 답했다.

“아이, 얼마든지 있죠. 난, 19세 아니면 (연애) 안 해요. 호호. 젊음은 아름다운 거예요. 내가 일전에 ‘아홉 살 인생’이란 영화를 봤는데, 거기 나오는 남자 아이가 너무 귀여워 ‘너 나중에 열아홉 살 되면 나랑 연극하자’고 했더니, 아이가 뭔지도 모르고 ‘네’ 이래요. 걔 클 때까지 나 건강해야 돼.”

“내 인생에 꼭 이루고 싶은 것, 더는 없어요. 정말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영정 사진도 찍어놨어요. 김용호(사진작가)가 찍어준 사진이 여럿 있는데 그중에 한복 입고 자연스럽게 웃는 걸로 찜했어요. 장례식 콘티도 다 짜 놨어요. 멋진 남자들더러 꼭 맞는 수트 입고 관을 들게 할 거야. 식장엔 내가 활동하던 모습을 영상으로 틀어놓고…. 나 죽은 거 생각도 안 하고 낄낄 웃는 자리가 됐으면 좋겠어요. 아니, 실컷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죽었는데 뭘 슬퍼해. 난 오래전부터 모드처럼 생각했어요. 죽음은 삶으로부터 또 다른 단계라고.”

마지막으로 배우 박정자를 긴장시켰던 파트너가 누구인지 물었다. “이 기사를 읽고 사람들이 나를 교만하다 여길지 몰라도”라면서도 답은 단호했다.

“글쎄요, 남자 파트너를 말하자면 ‘너 잘났어’ 할지 몰라도, 나를 압도한 배우는 (눈을 지그시 감으며) 한-명도 없었어요. 내 불행이기도 하죠. 추송웅(85년 작고)씨요? 같이 작품을 많이 해서 부부라고 생각한 팬이 있을 정도였고, 열정이 대단한 배우였지만, 아마 그이도 나한텐 못 당한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공연하면서 이 사람 때문에 긴장하고 전율한 기억이 (고개를 저으며) 한번도 없어요.”
그녀는 죽음 앞에 겸허했고, 생 앞에 당당했다.
사진 신인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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