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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책 ④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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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름 오르면, 바람 불면, 쩔쩔맨다

김훈의 시이야기 <내가 읽은 책과 세상> (푸른숲)
이성복 사진 에세이 <오름 오르다> (현대문학)

한때 당대의 문학 담당기자로 불렸던, 그러나 요즘엔 소설가로 문명을 떨치는 김훈의 기행 산문 한 편에 이런 문장이 있다.
‘사쿠라꽃 피면 쩔쩔맨다.’
누구나 그렇듯, 내게도 이런 장면 하나가 있다. 그러니까 난, 유채꽃 피면 쩔쩔맨다. 유채꽃은 3월이 절정이다. 하지만 2월이 채 시작됐을 뿐인 제주의 몇몇 유채꽃밭은 이른 봄날이 선사한 훈풍의 세례 속에 꽃을 피우는 중이다. 김훈의 책 <내가 읽은 책과 세상>에서 ‘제주’편(p.88)을, 이성복의 사진 에세이 <오름 오르다>를 손에 집어든 건 전적으로 그 때문이다. 거기엔 노란 유채꽃 얘긴 없지만 제주 길의 진면목인 ‘바람’과 ‘오름’이 있다. 그러니 수정해야겠다. 난, 바람과 오름 앞에만 서면 쩔쩔맨다.
제주에 가본 일이 있나? 중산간의 억새와 서쪽 들판의 보리, 훈풍에 몸을 떠는 유채의 리드미컬한 몸짓들은 왜 제주가 ‘바람 타는 섬’인가를 온몸으로 알려준다. 섬 전체가 바람 타는 시절에 홀로 바람타지 않는 것만큼 쉽지 않은 일은 없다. 시인 황동규가 썼듯, 제주의 길 위에서 사람들은 ‘살아 있는 것이 겁 없이 황홀해/ 더 앉아 가지 못하고/ 슬며시 일어서서/ 버스를 내린다.’ 제주에선 누구나 그렇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것은 제주의 바람이 명한 정언명령이다.

가령 속수무책의 겨울을 넘긴 봄날의 제주는, 이렇다. 어느 계절이 그렇지 않을까만, 봄날의 제주 바다는 바람에 따라 달라지고, 구름에 따라 달라지고, 하늘색에 따라 달라지고, 물때에 따라 달라지고, 보는 이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먼 바다에 정박한 어선의 불빛과 봄의 훈풍이 뒤엉킨 혼몽스런 분위기의 바다가 다르다. 여우비가 그친 직후 티 한 점 없는 하늘을 고스란히 받아 적은 바다가 다르다. 해가 뜨고 지는 바다가 다르고, 새벽 별과 어우러진 바다가 다르고, 죽음 같은 정적이 흐르는 칠흑의 바다가 다르다. 오죽하면 시인 이생진이 ‘어디서 이런 절미(絶美)한 세상을 만나겠는가’ 라고 말했을까.
‘섬의 속살’이라 불리는 중산간 지대는 또 어떤가. 한라산과 바다 사이를 가로지르는 중간 지대, 이름하야 ‘바람이 낸 길의 미학’. 이곳은 바다와 억새와 돌담을 휘감던 바람이 길을 낸 흔적이다. 이 흔적들은 지상 1만 피트, 아니 야트막한 오름에만 올라도 실핏줄 같은 비주얼이 마음을 뒤척이게 만든다. 돌담과 샛길의 경계만으로 천연덕스럽게 나뉜 중산간은 섬의 도처에 널려있다. 설령 이름모를 도로로 접어든다 해도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 쓸데없는 불안은 영혼만 잠식한다!

아담한 오름들을 부표 삼아 길을 내달리거나, 바다를 향해 조타수를 틀면 길이 끝난 곳에서 다시 길이 시작된다. 바람에 홀려 길을 잃었다면 내친 김에 마음까지 내던지면 그만이다. 웬만한 지도에는 기미조차 없는 ‘바람 길’을 누비다가 졸음이라도 밀려오면 녹슨 철망을 들추고 인적 드문 초원으로 스며든 뒤 잠을 청해도 아무도 탓하지 않는다. 운이 좋다면 안개와 비가 잦은 중산간의 특성에 의해 삽시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대한 오름을 목격할 수도 있다. 이때의 제주 들판은 도무지 재현할 길 없는 거대한 미스터리다.
제주 길의 메인 타이틀 롤은 누가 뭐래도 오름이다. 제주를 훑기 위해 짜놓은 단순한 동선에서 벗어나 오름에 다가서는 순간, 사람들은 섬의 물, 공기, 바람, 흙이 빚어낸 기묘한 세계에 접어들게 된다. 오름은, 그저 풍경 좋은 텍스트에 불과했던 제주를 운명적인 텍스트로 부르게 만든다. 오름의 존재만으로도 제주는 축복받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제주의 길 위에서 일회적인 시간과 공간을 연소의 재료로 삼아 셔터를 누른다. 그것으로 그만이다. 관광 팸플릿 속에 드러누운 채 꼼짝하지 않는 지겨운 이미지의 길들은 또 한 번 그렇게 사진 속에 갇힌다. 거기엔 어떤 계절적 띄어쓰기도 없다. 입체적인 장면의 분절도 없다. 말끔하고 이국적 풍경만으로 가득한 길. 만약 당신이 찍은 제주 길에서 바람이, 오름이 빠져있다면 그건 ‘앙꼬 없는 찐빵’이다. 그러니 어떠신가. 조금은 색다른 길 위의 풍경을 담아보는 건? 가령 시인 이성복이 묘사한 오름의 수많은 면모 중 하나라도 포착한다면? 그건 당신 역시 바람과 오름 앞에서 쩔쩔매기 시작했다는 증거다.
“드러나고 또 숨으며 다열 횡대로 물결치는 낮은 언덕들에서 문득 물비린내가 느껴지는 것은 횟집 수조 속에 꿈틀거리는 거뭇한 뱀장어들이 생각났기 때문일까. 또한 자맥질하는 검은 언덕들이 나란히 떼 지어 움직이는 모습은 해군에서 배를 탈 때 구룡포 앞바다에서 보았던 돌고래의 이동과 흡사해서, 무덤을 덮기 위한 잔디의 뗏장처럼 요동치는 바다 한 자락을 용접기로 절단해놓은 듯한 느낌이다.”(<오름 오르다>, p192)

글_문미루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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