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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디자이너, 세계 패션의 미래 이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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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한국과 일본에서 온 재능 있는 신인들이 08~09 가을·겨울 파리 패션쇼를 빛냈다.”

프랑스 유력지 르피가로는 지난달 22일 이번 시즌을 정리하면서 이렇게 보도했다. 파리에선 17일부터 나흘간 올 가을·겨울을 겨냥한 남성복 프레타포르테(기성복) 패션쇼가 열렸다. 이번 시즌에는 150여 명의 디자이너가 각축을 벌였다. 르피가로는 ‘아시아적 창의력의 부활’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이 가운데 한국인 패션 디자이너 우영미(49)·정욱준(42)·박윤정(31)을 자세히 소개했다. 야스히로 미하라와 일본 브랜드 아타슈망도 함께 다뤘다.

한국인 패션 디자이너들의 파리 진출은 일본보다 40년 정도 늦었다. 일본은 이미 1970년대 다카다 겐조(高田賢三), 80년대 야마모토 요지(山本耀司), 가와쿠보 레이(川久保玲), 미야케 이세이(三宅一生) 등이 파리에서 각광 받으며 세계 패션시장의 주류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의 디자이너들이 일본 디자이너들과 나란히 소개된 것은 그만큼 실력을 인정 받았다는 뜻이다. 파리 현지에서 이들을 만났다.

파리=강승민 기자



우영미씨 “개성 있어야 프랑스서 성공”

우영미씨는 2002년 파리에 데뷔한 이래 지금까지 매년 두차례씩 꾸준히 패션쇼를 열고 있다.

2년 전 파리의 패션 리더들이 모이는 마레 지구에 단독 매장을 마련했다. 최고급 백화점인 봉마르셰 1층의 명품 남성복 코너에도 입점했다. 현지인의 인기가 높자 봉마르셰 측은 올 봄부터 우씨의 코너를 2배로 늘릴 예정이다.

-파리 현지 반응이 뜨겁다.

“단독 매장이 있는 마레는 패션에 민감한 소비자가 대다수다. 관광객도 꽤 많다. 내 옷은 파리 현지 고객이 60% 이상이다. 정장 한 벌에 한국돈으로 100만원이 넘는데, 명품 브랜드 디자이너나 매니저 등이 단골이다. 영국이나 독일에서도 일부러 찾아오는 손님들이 많다.”

-한국에서 편안하게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지 않았나.

“특별한 이유가 있어 온 건 아니다. 패션 디자이너로선 아주 당연하게, 파리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그런 열망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지난 6년간 끊임없이 나를 학대했다.”

-왜 그랬나.

“한국에선 1등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처음 오니 신인이었고, 아시아인이었고, 또 남성복을 만드는 여성이었다. 한마디로 ‘열등생’이므로 더 발전하기 위해 스스로를 매섭게 채찍질 할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서와는 무엇이 다른가.

“이곳에선 창의성을 가장 높이 사 준다. 어떤 브랜드가 중요한 것도 아니고, 다른 무엇도 아니다. 그 디자이너만이 할 수 있는 것, 우영미라고 하면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개성이 있으면 그것을 인정해 주고 또 곧바로 시장으로 연결된다. 프랑스 패션의 경쟁력은 ‘누군가 새롭게 창조해 낸 무엇에 대한 존경’이다.”

-‘우영미’하면 무엇이 떠오른다고 말하나.

“깨끗하고 우아하면서 섬세하다는 평이 대부분이다.”

-세계 시장에서 목표는.

“현재 프랑스·영국·이탈리아·벨기에·독일·미국·러시아·일본·홍콩의 유명 백화점과 고급 편집 매장에서 ‘우영미’ 브랜드를 만날 수 있다. 더 기반이 넓어진다면,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일본 디자이너들처럼 세계적인 남성복 브랜드가 되고 싶다.”



정욱준씨 “리복 운동화 새 모델 디자인”

정욱준씨는 지난해 컬렉션에 첫 참가한 뒤 150여 명의 디자이너 중 르피가로가 선정한 ‘주목받는 6명’에 들었다. 올해는 세계적인 스포츠 브랜드 리복의 후원으로 쇼를 열었다.

리복 코리아 마이클 콘란 대표는 “차세대 세계 패션시장에선 정씨를 비롯한 한국인들이 주역을 맡게 될 것”이라며 “압축 성장을 이룬 한국 소비자들은 안목이 예리하고 판단도 빨라 이들에게 단련된 한국인 디자이너는 세계시장서 통할 수밖에 없다”라고 설명했다.

-패션쇼 준비는 어렵지 않았나.

“첫 번째보다 더 떨리더라. 첫 번째 쇼에 쏟아진 뜻밖의 격려가 더 부담스러웠다. 한국에선 이름만 대면 알아줬지만, 이곳에선 아직 신인이라 모든 게 조심스럽고 힘들었다.”

-두 번째 패션쇼에 대한 반응은.

“영국의 유명 패션잡지 아이디의 줄리 라스키 편집장이 쇼가 끝난 뒤 무대 뒤로 찾아왔다. ‘파리에 오기 전 밀라노 남성복 패션쇼까지 보고 왔는데, 이번 시즌 밀라노·파리에서 가장 완벽하고 아름다웠다’고 말했다. 감격스러웠지만 부담스럽기도 했다.”

-세계적인 브랜드에서 준지(Juun.J: 정욱준이 자신의 이름을 따 지은 해외 진출용 브랜드) 라인을 선보인다던데.

“리복에서 80년대 전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엑소핏이라는 운동화의 21세기 버전을 만드는 것이다. 한국에서 우선 출시하고, 반응이 좋으면 아디다스의 스텔라 매카트니(비틀스 멤버 폴 매카트니의 딸) 라인처럼 전세계로 확대할 계획이다.”

-패션쇼에 유명 매체 기자들과 바이어 등 관객이 많았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 파리에서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한다. 구매 상담이나 언론 홍보는 따로 담당을 둔다. 파리 패션계 거물인 토템사의 쿠키 드살베르가 ‘당신은 지금 사람들이 찾는 옷을 만드는 디자이너’라며 함께 일하고 싶다고 했다. 아무리 옷이 좋아도 일단 바이어와 언론, 고객들이 패션쇼에 찾아와 줘야 하는데 이 역할을 토템사가 해주고 있다.”

-다음에도 ‘훌륭한 쇼’를 하려면 작품이 잘 팔려야 하지 않나.

“구매 상담을 대행하는 회사엔 프랑스인 라프 시몽 같은 쟁쟁한 디자이너들 작품이 함께 있다. 그곳에선 ‘준지’의 옷이 주력상품이다.”



박윤정씨 “유럽인들 동대문 옷 좋아해”

이탈리아 명품 남성복 브랜드인 스말토의 수석 디자이너인 박윤정씨는 지난해 첫 패션쇼에서 “브랜드를 성공적으로 혁신했다”(AP통신)는 평가를 받았다. 스위스에서 태어나 우리말과 프랑스어·독일어·영어·이탈리아어 등 5개 국어를 완벽하게 구사하는 박씨는 파리의 패션전문학교 에스모드를 졸업했다. 르피가로는 스말토의 패션쇼에 대해 “(박씨의) 소재 선택이 완벽하다”고 칭찬했다.

-스말토는 한국인에게 낯선 브랜드다.

“이탈리아 디자이너인 프란체스코 스말토가 만들었다. 40여 년 전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해 대통령 등이 입는 고급 남성복으로 사랑받고 있다. 은퇴한 스말토의 뒤를 이어 프랑크 보클레가 디자인을 맡았다가 지난해 내가 이어받았다.”

-스위스에서 태어났는데 한국말을 잘한다.

“당연하다. 나는 한국인이니까. 부모님도 나도 한국·한국인·뿌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한국에도 자주 가고 동대문 시장 쇼핑도 좋아한다. 동대문에서 산 옷은 디자인 계통에 있는 내 유럽 친구들 모두가 좋아한다. 유럽 옷과 다르면서도 아름답다고 한다.”

-한국 패션과 일본 패션의 다름 점은.

“동대문 옷에 대한 친구들 반응이 재밌다. 일본 패션은 너무 특이해서 받아들이기 힘들다고 말한다. 그에 반해 한국 옷은 확실히 유럽 것과 다르면서도 포인트가 살아 있고 색상도 화려해서 좋아한다. 최근 들어 한국 영화가 프랑스에서 개봉하면서 나라 이미지가 더 좋아지고 있으며, 그러면서 한국 패션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늘고 있다.”

-패션을 공부하는 데 한국 사람만의 장점이 있나.

“호기심이 많고 아주 세심하다. 스위스에서 태어났지만 나도 한국인이라 유럽 사람보다 훨씬 부지런하다. 숙제로 재봉틀 일자 박기를 연습할 때였다. 유럽 아이들은 대충대충 해 왔지만 나는 맘에 들 때까지 뜯고 박고를 반복하며 밤을 샜다. 가르치는 선생님들도 한국 사람들이 섬세하고 열심히 한다는 것, 눈썰미도 좋고 감각이 뛰어나다고 평가한다.”

-정통 남성복의 여성 디자이너로서 어려움은 없나.

“오히려 ‘스말토의 수석 디자이너는 한국 여성’이라며 주목받아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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