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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두 발을 세계 지도에 찍어라 ②

중앙일보

입력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세계 일주를 한 사람들의 이야기

‘쥘 베른’의 소설 <80일간 세계일주>에서 주인공 필리어스 포그가 세계 일주를 떠나던 시기는 1872년이다
지금으로부터 136년 전인 1872년이면 우리나라는 고종9년 되던 해로 대원군이 집권하던 시기로 조선시대의 관선지도 제작 사업이 전국적으로 추진되던 해였으니 세계는 둥글다는 지식이 보편화되고 교통이 발달되면서 세계관이 바뀌고 있던 시기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역관들의 세계여행 기록은 서양에 비해 약간 늦다. 1883년 민영익은 통역인 변수(일본어 통역), 고영철(중국어, 영어통역), 퍼시빌로웰(미국인), 우리탕(중국인), 미야오카 쓰네지로(일본인) 등과 함께 보빙사로 미국에 파견된다.

“이 일을 어찌 할꼬! 이 일을 어찌 할꼬! 이 나라는 땅 밑으로 철마가 다니는데 우리는 사람이 사람을 이고 다니니, 이 일을 어찌 할꼬! 빨리 주상께 아뢰어야 하겠다.”

민영환 사진

1896년에 민영익의 사촌 아우 민영환은 김득련, 김도일, 윤치호 들과 함께 러시아황제 니콜라이2세 대관식에 참석하면서 중국, 일본, 미국, 영국, 네덜란드, 독일, 폴란드, 러시아, 몽고 등 9개국을 거치며 세계 일주를 하고 돌아온다. 민영환이 11개국 6만 8천리를 여행하며 쓴 일기 형식의 기행문인 <해천추범>은 “넓은 세계로 돛을 올리다.”라는 뜻이다. 민영환은 서양의 문물을 보고 느낀 놀라움과 신기함을 <해천추범>에 기록해 두었다.
먼저 <해천추범>에서 민영환의 목소리를 듣도록 하자. 그는 우선 탈 것에 압도된 듯하다. 여객선의 규모도 규모거니와 그 여객선 위를 자유분방하고 호들갑스러운 서양 여인들은 출발하기도 전에 상상 이상의 문화적 충격을 준 듯하다.
“동방예의지국의 나라 조선을 떠나 난생 처음 거대한 여객선에 몸을 싣고 보니 진기한 것 일색이로다. 이상한 색깔이지만 눈 하나는 시원한 서양의 요조숙녀들. 어찌 그리 요란한 옷을 입고 있는가. 내 얼굴이 잘 생겨서일까. 아니면 남녀칠세부동석을 몰라서일까. 거침없이 군자의 옆자리에 다가와 재잘대는구나.”
서양 여인들의 ‘요란한 차림’과 ‘재잘댐’에 놀란 가슴은 이내 서양 남자들에 대한 탄식으로 이어진다.
“청중이 모인 자이에서 웬 신사가 목살에 힘줄이 돋칠 정도로 소리를 지르니 모두들 그(테너)를 우러러 보더라. 서양에서 군자 노릇 하기란 원래 저리 힘든가 보다.”
그리고 포크와 나이프, 커피와 치즈, 민영환은 이것들 앞에서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않는다.
“양반네 진짓상에 웬 쇠스랑(포크)과 장도(나이프)는 등장하는가. 입술이 찢기지 않으면서 접시의 물건을 입에 넣는다는 것은 참으로 고역이구나. 희고 눈 같은 것(설탕)이 달고 달기에 이번에도 눈 같은 것(소금)을 듬뿍 떠서 찻종에 넣으니 그 갈색물(커피)은 너무 짜서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더라. 노르스름한 절편(치즈)은 맛도 향기도 고약하구나.”
서양이 동양을 한 발 앞지르고 있던 것은 단연 과학과 기술일 텐데, 결정적으로 게다가 수평이동이 아니라 수직이동을 하는 기구와 그 기구의 움직임을 가능하게 한 것은 그 어떤 가마꾼도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너무도 신비로운 전기였다는 사실 앞에서 그는 무릎을 치고 감탄한 듯하다. 아마 그의 머리에 전기가 번쩍 하지 않았겠는가. 벤쿠버 호텔의 엘리베이터를 탄 후에 그는 이렇게 쓴다.
“5층 높이에 넓게 트인 집이었는데 오르고 내리기가 쉽지 않을 것을 헤아려 아래층에 한 칸의 집을 마련하여 전기로 마음대로 오르내리니 기막힌 생각이다.”
수직의 충격을 더하는 것으로는 아무래도 아파트만한 것이 없었을 터. 런던의 풍경을 그는 이렇게 쓰고 있다.
“땅은 좁고 사람은 많아서 거리 곳곳에 땅을 파고 굴을 몇 층으로 만들었는데 그 속에서도 역시 사는 집이 있고 점포가 있어서 수레와 말이 왕래하니 그 번성함이 천하에 제일이로다.”

≪朝鮮地圖≫에 수록되어 있는 천하도. 세계지도

당시 유럽은 1864년 철도건축자 죠지 모티마 풀맨이 영국 브라이톤에서 기차를 발명한 이후 영국과 프랑스를 페리로 연결하는 노선도 개발되었고, 유럽각국이 앞 다투어 레일을 깔면서 넓기만 했던 대륙이 섬세한 핏줄로 팽팽하게 당겨지고 있던 시기이다.
1872년 미국의 지도에도 광활한 미대륙을 연결시키는 안락한 철도노선이 그려졌고 그 영향으로 유럽의 지도에도 벨기에 출신의 엔지니어 조르주 니켈마커스에 의해 최고급 오리엔트 특급열차가 파리에서 이스탄불까지 달릴 수 있도록 레일을 그려 넣을 수 있었다.
캐나다 벤쿠버에서 미국 뉴욕으로 가는 대륙 횡단 기차를 탄 민영환에게 기차 또한 낯선 것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가마나 말을 타고 다녔는데 엄청난 속도로 달리는 기차를 보고 민영환은 다음과 같은 기록했다.
“지나는 곳은 바다를 껴서 길이 험한데 산에는 사다리를 물에는 다리를 놓고 쇠로 궤도를 놓아 바람이 달리고 번개가 치듯이 빠르니 보는 것이 금방 지나가 마치 꿈속과 같고 아득하여 기억할 수가 없다.”
기차는 계속해서 죠지 모티마 풀만과 27세의 벨기에 출신 엔지니어인 죠르쥬 니겔마커스가 서로 연계해 1881년 최초로 식당차가 도입되고 1883년 10월4일 파리와 콘스탄티노플을 연결하는 오리엔트 특급 1번열차가 운행되게 된다.
그 유명한 오리엔트특급의 영화 배경이 되던 시기도 이 무렵이다
이 열차는 영국 런던을 출발해 도버해협을 거쳐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유고슬라비아를 거쳐 불가리아, 그리스, 터키, 이스탄불에까지 유럽13개국을 넘나들며 레일위의 특급호텔로 명성을 떨치게 된다. 선박기술과 철도기술은 대륙과 내륙을 연결하며 세계일주의 꿈들을 앞당기기 시작했다.
최근 항공기가 본격적으로 운행되고 전반적으로 철도 이용객이 크게 줄어들어, 오리엔트 특급열차는 점차 경쟁력을 상실하게 되었으며 결국 1977년 5월 운행이 중단되기에 이른다. 세계가 그만큼 다가서고 있는 것이다

오리엔트 특급열차의 마지막 종착역 시케지역- 지금은 관광명소로 식당으로 사용한다

<도움말: 경운박물관. 서울대학교 규장각 고지도 자료>

객원기자 장치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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