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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의 책] 시간이 부족한 당신, 이 사람을 보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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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도가 전부다. 이 하루는 그 일년과 맞먹고 그 반평생은 이 반나절에도 미치지 못한다. 문체든 인생이든 밀도가 떨어지는 텍스트는 논할 가치가 없다.

열정이 곧 재능이 아니라 그 열정을 평생의 과업에 지속적으로 쏟을 수 있는 '방법론'을 아는 것이 곧 재능이어야 한다. 한없이 뻑뻑하게 인생의 밀도를 채워나간 러시아 과학자 류비셰프는 그 지난한 앎의 과정을 일기에 고스란히 남겨두었다. 허풍쟁이로 비웃음을 한몸에 받으면서도 책상 앞에서는 경건하게 16시간 동안 집필과 퇴고를 감수한 발자크, 자신이 쓴 글자 수를 매일 기록한 헤밍웨이 등도 정해진 시간 속에서 고군분투한 인간이다. 그러나 류비셰프처럼 그 모두를 매일매일 기록하고 월별, 연별 그래프와 표를 작성한 이는 일찍이 없었다.

우리 중 누구도 류비셰프처럼 살 수 없고 살 필요도 없다. 이 책의 저자 그라닌은 "오래 전에 멸종한 공룡처럼 이런 종류의 사람은 이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책머리에서 꼬집었다.

요즈음 쏟아지는 '아침형 인간'류의 시간 안배 테크닉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이 책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 책은 류비셰프의 삶 전체를 체계적으로 조감하고 있지도 못하다. 오히려 그라닌은 경이로운 눈망울로 장마다 새로운 물음을 쏟아낸다. 그 물음들은 시간과 맞서 싸울 수밖에 없는 저 깊은 인간 실존에 맞닿아 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은 류비셰프의 방대한 연구 실적이 아니라 엄청난 글을 쏟아낼 수 있었던 '삶의 방법'으로 바뀐다. 시대나 국적은 달라도 시간의 활용과 집중은 인류의 보편적인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다작이 반드시 탁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 깃든 한결같음의 위력은 외면하기 어렵다.

한결같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변화에 민감해야 한다. 그러나 보통 사람들은 나 자신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일에 대한 열정.취향.관심사가 어떻게 바뀌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 이 무지는 심각한 결과가 일어나기 전까지 미세한 변화를 확인할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류비셰프는 그 방법을 도끼눈을 뜨고 시간을 노려보는 데서 찾았다. 그는 하루하루를 거울처럼 기록하면서 자신의 삶을 주기적으로 되짚어 통계를 뽑는다. 그 시간통계를 바탕으로 어제를 반성하고 내일을 계획한다. 무엇이 변하였고 무엇이 한결같은가를 시간에 기대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시간을 잣대로 자신을 측정하는 것은 그라닌의 지적처럼 끔찍한 일이다. 감정도 이성도 없는 시간은 어떤 변명도 들어주지 않는 법이다. 그러므로 시간의 숫자놀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강철 같은 의지가 필수적일 수밖에 없다.

시간에 대한 철저한 자기 관리는 학문을 하는 자세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논쟁 없는 진리, 근거 없는 확신, 절대적인 판단 앞에서 몸서리쳤기에 그는 늘 논쟁 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싸움은 자신의 전공 영역에 머무르지 않고 일파만파로 퍼지는 형국이지만, 이 깐깐한 과학자는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영국 화가 마크 퀸은 5년마다 자신의 피를 4ℓ씩 뽑아 '셀프(self)'란 제목으로 두상을 만들었다. 류비셰프 역시 시간을 눈에 보이는 물체처럼 만들어 자신의 삶을 '채굴'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 끔찍한 자기로의 몰입을 집착이라고 하든 사랑이라고 하든 류비셰프가 인생의 벽돌을 한장 한장 쌓을 때마다 최선을 다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허나 어찌 인간이 시간을 정복할 수 있으랴. 산이 거기에 있어 오르듯 시간 역시 거기에 있으므로 맞설 따름이다. 그라닌은 소설가처럼 내면을 그리지는 않겠노라고 슬쩍 비켜섰으니, 이제 직선적이고 저돌적인 시간 인식의 극한에서 류비셰프가 떠안은 불안을 상상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진지하면서도 우스운 상상 하나. 말 그대로의 꽉 찬 충만을 꿈 꾼 류비셰프에게 '노장(老莊)'의 텅 빈 충만을 선물하면 어떻게 답할까. 이 분류와 통계의 귀재는 노장의 책을 읽은 시간과 그 책을 가지고 고민한 시간을 각각 또 자신의 일기에 건조하게 적으리라. 정말 못 말리는 그래서 더욱 사랑스러운 인간이다.

김탁환<소설가.한남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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