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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대선, 죽은 레이건·루스벨트가 맞붙는다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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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호 10면

“레이건은 미국이 나아갈 방향을 바꿨다. 리처드 닉슨이나 빌 클린턴은 그러지 못했다. 레이건은 국민이 이미 느끼고 있던 것에 부응했다. 10년 혹은 15년간 공화당은 아이디어 정당이었다.”

미국 대선에 출마한 어느 후보가 한 말이다. 그 후보가 공화당원이라면 문제되지 않겠지만 이 말은 민주당 경선을 치르는 버락 오바마가 했다. 가제트 저널이라는 지역신문과 17일 인터뷰하던 중 나온 말이다.

힐러리 클린턴 후보 캠프가 오바마의 이런 발언을 놓칠 리 없다. 힐러리는 상당한 표차로 질 가능성이 큰 26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프라이머리(예비선거)를 앞두고 라디오 광고에서 오바마의 레이건 ‘찬양’ 발언을 집중 공격했다. 25일 MSNBC 여론조사에 따르면 힐러리의 지지도는 30%에 그쳐 오바마에 8%포인트 뒤졌다. 존 에드워즈 후보도 거들었다. 그는 “탐욕스러운 기업들이 미국의 목을 조르고 있다. 미국에 필요한 것은 레이건이 아니다. 미국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 같이 기업에 대항할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미국 선거판에서 민주당 후보라면 프랭클린 루스벨트의 길을 걷겠다고 다짐하는 게 정석으로 통한다. 루스벨트는 보수진영에서 ‘민주당의 신(神)’이라고 비꼴 만큼 민주당 지지자들로부터 존경받는다.

물론 오바마의 노림수는 레이건이 미 국민에게 상상력과 희망을 안겨줬으며 자신도 그런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려는 것이다. 그는 진작부터 ‘흑인 케네디’ ‘민주당의 레이건’이란 별명을 얻었다.

‘변화와 통합’을 내세우는 오바마로선 레이건을 소재로 활용하는 게 지지기반 확장에 유리하다. 레이건은 1980년대 말 민주당 표밭인 미국 남부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80년대 초반부터 레이건은 ‘레이건 민주당 지지층(Reagan Democrats)’이라고 불리는 미 북부지역 백인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이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했으나 민주당이 실업자·흑인 문제 등에 매달려 자신들을 외면하고 있다고 판단해 레이건 쪽으로 기울었다. 일각에선 ‘오바마 공화당 지지층(Obama Republicans)’이 형성되면 오바마가 이긴다는 분석이 제기되고 있다.

상대편 정당 지도자를 칭찬하는 것은 미국 정치 전통에서 낯설지 않다. 레이건은 82년 루스벨트 대통령에 대해 “미국 역사에서 진정으로 위대한 인물이다. 이 거인은 국민을 이끌어 험난한 시기를 헤쳐 나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힐러리 후보는 어떨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대통령으로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꼽은 적이 있다. 그럼에도 힐러리가 오바마의 발언을 문제 삼는 것은 이념적으로 유사한 민주당 선두주자의 자리를 놓고 어려운 싸움을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유권자들은 요즘 ‘위대한 지도자’에 목말라 있다. 이라크전쟁과 금융부실, 경기침체 등 수많은 난제에 대해 조지 W 부시 행정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불만이 증폭되고 있다. 유권자들이 떠올리는 ‘위대한 대화자(Great Communicator)’는 레이건이다. 국가 정책을 쉬운 말로 국민에게 설득했고 자신감을 심어줬다. 레이건 시대에 ‘공화당이 아이디어 정당’이었다는 말도 오바마가 처음 한 말이 아니다. 당시 국민 다수가 이를 인정했으며 심지어 미국 고등학교 교과서에도 이 표현은 등장한다.

따라서 대선 레이스에 나선 공화당 후보들은 앞다퉈 레이건의 후계자임을 자처하고 있다. “레이건은 내게 영감을 준다”(미트 롬니), “오늘 우리에겐 레이건의 믿음이 얼마나 필요한지 모른다”(프레드 톰슨), “프레드 톰슨은 최근에야 레이건주의자가 됐지만 우리는 진작부터 그랬다”(마이크 허커비).

10일 사우스캐롤라이나에서 열린 공화당 후보 토론회에서 6명의 후보는 레이건을 무려 34회나 언급했다. 톰슨은 30년 전 레이건과 찍은 흑백사진을 TV광고에 활용하고 있다. 매케인 후보는 레이건 행정부에서 일했던 인사들 100여 명의 지지 선언을 받았다는 사실을, 루디 줄리아니는 레이건 행정부 당시 법무부에서 일했다는 사실을 자랑하고 있다.

공화당 후보들이 레이건에 집착하는 것은 ‘레이건 혁명’에 대한 향수와 그 재현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레이건은 80년 대선에서 압승한 후 대대적인 개혁작업에 착수했다. 이를 가능케 한 것은 ‘레이건 연합(Reagan Coalition)’이다. 이 연합은 ‘서로 다른 이유’로 보수적인 사람들로 구성됐다. 레이건 연합은 낙태·동성애에 반대하는 윤리적 보수주의자, 작은 정부와 친(親)기업 정책을 바라는 경제적 보수주의자, 강경한 대외정책을 바라는 국가안보 보수주의자로 이뤄진 보수주의 연합군이다. 현재 공화당 후보 중에서 레이건의 후계자로 인정받는 후보는 없다. 그런 만큼 공화당 후보들의 ‘레이건 따라 하기’ 작전은 더욱 치열해질 가능성이 크다.

공화당에 레이건이 있다면 민주당에는 루스벨트가 있다. 2008년 미 대선은 레이건과 루스벨트의 대리전으로 흐를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루스벨트의 유산이 민주당뿐만 아니라 미국 정치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레이건 연합에 해당하는 게 ‘뉴딜 연합(New Deal Coalition)’이다. 노조, 소수 인종·민족, 지식인, 농업 종사자 등으로 구성된 이 연합은 루스벨트가 4선 대통령이 되도록 밀어주었다. 그러나 뉴딜 연합은 60년대 말에 붕괴했다. 따라서 레이건과 자신을 노골적으로 동일시하는 공화당 후보들과 달리 민주당 후보들은 루스벨트 한 명에게 매달리지 않는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민주당 후보들이 반드시 인용해야 하는 인물이다. 힐러리가 리더십의 모범으로 삼는 대통령은 시어도어 루스벨트,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린든 존슨이다.

오바마는 2007년 7월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위기 극복에 필요한 지도자의 전형으로 프랭클린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 존 F 케네디를 꼽았다.

하지만 루스벨트·레이건의 인기는 최근 역전되는 추세다. 학자들을 대상으로 한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레이건은 90년대에 20위 바깥이었다. 그러나 2005년 월스트리트 저널이 실시한 조사에서는 6위를 차지했다. 루스벨트는 5위였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갤럽의 지난해 2월 조사에선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은 레이건’이라고 응답한 사람들이 둘째(16%)로 많았다. 에이브러햄 링컨이 1위(18%), 루스벨트는 5위(9%)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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