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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人terview] “운하 국민투표 부칠 일 아니다”

중앙일보

입력

이코노미스트

■ 이념의 눈 아닌 상식의 눈으로 세상 봐
■ MB, “당신은 99가지가 좋은데 한 가지가 나빠”
■ MB는 자기를 죽이면서 쟁취하고 나는 싸워서 쟁취
■ 자전거로 13년간 매일 새벽 5시 지역구 돌아
■ 정치인은 지역구 전봇대 하나에도 애정 바쳐야
■ 집사람 소원은 국회의원 월급 통장 한번 보는 것

‘이명박을 대통령으로 만든 사람’으로 불리는 한나라당 이재오 의원. 그는 운전면허도 없고 골프와 술도 못하는 3선 의원이다. 대신 자전거에 정을 붙였다. 새벽 5시30분이면 어김없이 자전거를 타고 지역구를 순례한다. 벌써 14년째다. 지난 추석 연휴엔 한반도 대운하 물길을 따라 500여㎞를 자전거로 달렸다. 대선이 끝난 후엔 이명박 당선인의 제1 공약인 한반도 대운하 TF 상임고문에 러시아 특사 임명장까지 받았다. 이 당선인의 최측근 실세로 주목 받고 있는 그를 만났다.


러시아 출국을 나흘 앞둔 이재오 의원은 바빴다. 인터뷰 약속시간은 지난 1월 16일 오후 2시. 시간에 맞춰 갔지만 의원실 복도에서 무작정 기다려야 했다. 방송국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기다리는 중에도 개별 면담을 하러 온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방문자들은 복도 한쪽에 마련된 탁자에 앉아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인터뷰는 예정시간보다 40여 분이나 지나서 시작됐다.

“미안합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서…. 요즘은 화장실 다녀 올 시간도 없어요.”(웃음)

‘이재오’는 지금 권력의 중심에 있는 듯했다. 불과 2개월 전만 해도 그는 당 최고위원직 사퇴라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독이 된 말 때문이었다.

지난해 10월 말 대선 과정에서 이 의원은 박근혜 전 대표 진영을 향해 “한나라당의 분열 세력을 좌시하지 않겠다”고 말해 최고위원직을 사퇴해야 했다. 그 당시의 심정에 대해 묻자 “비참하다 못해 처참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좌시하지 않겠다는 표현을 직접적으로 하지 않았어요. 언론에서 말이 왜곡된 겁니다. 경선이 끝나고 대선이 40여 일밖에 남지 않았는데 당이 전혀 준비를 하고 있지 않아 분통이 터졌어요. 이명박 후보가 낙마할 것이라느니…. 여전히 경선 시절 싸움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한마디 내뱉은 거였죠. 오만방자하다는 소리까지 들었는데…. 그런 큰 오해를 불러일으킬 줄 몰랐습니다.”

1945년 해방둥이로 태어난 이재오는 싸움꾼이다. 속에 있는 말을 돌려서 말하는 것을 천성적으로 하지 못한다.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면 내뱉어야 직성이 풀린다. 토의종군 사태도 이런 그의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터진 일이었다.

역사는 투쟁을 통해 바뀐다는 생각으로 43년을 투쟁하며 살았다. 1964년 중앙대 농촌사회개발학과에 입학한 그는 이듬해 6·3 한일회담 반대 운동 주도로 제적을 당한다.

이후 유신반대, 범민족대회 관련 등으로 다섯 번이나 감방을 다녀와야 했다. 수배생활 7년, 감옥살이 10년, 광주교도소에서만 3년을 살았다. 그가 중앙대 졸업장을 딴 건 입학한 지 32년 만인 96년이었다.

71년 재야 청년단체의 효시인 ‘민주수호청년협의회’ 회장을 맡았고, 91년엔 진보정당인 민중당을 결성했다. 그러던 그가 95년 15대 신한국당 국회의원으로 입성한다. 골수 운동권에서 보수정당으로 이적한 것을 두고 ‘변절자’란 공격을 받았다.

“민중당은 계급정당은 아니었습니다. 친북 좌파정당도 아니었고요. 민주화 반독재 투쟁을 하면서 감옥을 수시로 드나들게 되자 회의가 들더군요. 수배 당하고 잡혀가고, 고문 당하고…. 이런 과정이 너무 싫어 이우재, 정태윤 등 민주화 세력들을 결집해 정당을 세운 겁니다. 정당 활동은 합법적이잖아요.”

“대선을 끝으로 투쟁 역사 접었다”

민중당은 실패했다. 바로 이어진 선거에서 3%에 미치지 못하는 득표율로 해체됐다. 김영삼 대통령은 정권 말기 두 번이나 이재오를 불러 출마 권유를 했다. 그는 계룡산에 들어가 고심 끝에 입당 제의를 받아들였다. 96년 지역구인 은평구에서 서울시 최다 득표(4만8146표)로 ‘화려하게’ 국회에 입성한다.

“극과 극은 통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보수정당을 개혁시킬 수 있다면 거기에도 제 역할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죠.”

보수정당에 들어갔지만 투쟁은 멈추지 않았다. 옷 로비사건, 이용호 게이트 특검 법안 관철 등 DJ정부의 부패를 공격하는 데 앞장선 것.

“나의 운동 역사는 그다지 이념적이지 못했습니다. 이념을 생각할 겨를도 사실 없었어요. 이념의 눈이 아닌 상식의 눈으로 세상을 봤습니다. 상식적으로 보고 옳지 않은 건 바꿔야 한다고 생각해 싸운 겁니다. 이명박 정부의 실용주의와도 통하는 말이죠.”

현실에 뿌리를 둔 사고와 경험을 통해 실천한다는 것이 그의 투쟁 원칙이었다. 이런 그가 대선 직후 투쟁 종식을 선언했다. “내 43년 투쟁의 역사는 지난 대선으로 끝났다”고 말한 것. 원하던 정권교체를 이뤘으니 이젠 투쟁보다 섬김의 길을 걷겠다는 것이다. 이명박 당선인의 영향이 컸다.

‘좌시하지 않겠다’는 발언 파동 직후 그는 억울한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수세에 몰리던 이 의원은 최고위원 회의장에서 격한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고 책상을 치며 항의했다. 이 일이 일파만파로 퍼지면서 이명박 당선인(당시 후보)이 이 의원을 조용히 불렀다.

“저에게 그러더군요. ‘당신은 99가지가 다 좋은데 한 가지가 나쁘다. 그 한 가지가 참지 못한다는 거’라고요. 왜 참지 못하고 소리 질렀나. 실속도 없이 소리만 지르면 다냐고요.”

자신이 이미 알고 있던 단점을 정색을 하고 조목조목 지적하는 이 후보 앞에서 그는 식은땀을 흘렸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라 아무 소리도 못했습니다. 저랑 알고 지낸 지 12년 만에 처음 듣는 핀잔이었죠.”

이 의원이 이명박이란 이름을 처음 접한 건 1964년이다. 이명박 당선인은 한일회담 반대 학생운동인 6·3사태 때 고려대 상과대 학생회장, 이 의원은 중앙대 구국투쟁위원장이었다. 이명박은 61학번, 이재오는 64학번이다.

당시 ‘이명박’이란 이름은 운동권 사이에선 꽤 알려진 이름이었다. 하지만 직접적으로 얼굴을 보진 못했다. 둘은 각자 다른 길을 돌다 국회에서 만난다.

이 당선인은 대학을 졸업하고 현대그룹에 입사한 후 92년 14대 국회에 입성했고, 이 의원은 제적된 후 민주화 운동을 계속하다 95년 15대 국회의원이 된 것. 92년 6·3동지회에서 이 당선인이 회장을 하고, 이 의원이 부회장을 하면서 잠깐 조우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둘의 관계는 사적이지 않았다.

“MB는 인내심 대단한 사람”

본격적인 둘의 만남은 15대 국회 시절부터였다. 이 당선인은 이 의원에게 운하 건설에 대한 본인의 의지를 처음 내비쳤다.

“벌써 12년 전 이야기입니다. 그때도 이 당선인은 하류의 폭과 지층, 기술적으로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를 저에게 꼼꼼히 설명했습니다. 제가 그 얘길 듣고 ‘형님이 대통령 하시오’ 했습니다. ‘운하를 꼭 합시다. 국회는 내가 하겠으니 형님은 서울시에서 경험을 쌓으시오’라고 했죠.”

‘이명박을 만든 이재오’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그는 MB와의 약속을 지켰다. 2002년 당 기반이 약했던 이명박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아 선거전을 진두지휘, 결국 이명박 서울시장 만들기에 성공했다. 곧바로 서울시장직무인수위원장을 맡아 청계천 복원사업, 강남북균형개발사업 등 공약이행 작업을 점검하는 일도 도맡았다.

“MB는 자기를 죽이면서 쟁취하고 저는 싸워서 쟁취한다는 것이 다른 점입니다. MB는 인내심이 대단한 사람입니다. 본인이 절대 먼저 얘기 안 하고 들어본 뒤 한참을 생각한 후 결정합니다. 웬만하면 화도 안 내요. 저와도 12년간 한 번도 다퉈 본 일이 없었습니다. 저를 불러놓고 야단친 것도 참고 참다 나온 말이었을 겁니다.”

▶“자전거는 후진이 없습니다. 내가 설 때까지는 가는 겁니다. 지나치는 것들을 속속들이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지난 투쟁의 역사도 그렇고…. 앞으로도 자전거 철학을 따를 겁니다.

MB 못지않은 운하 예찬론자

이 의원은 MB 못지않은 운하 예찬론자다. 한반도 대운하 전도사도 자청해서 나선 일이다. 현재 머릿속 가장 크게 짓누르고 있는 고민이 뭐냐고 묻자 그는 일언지하 “운하”라고 답했다.

“1년에 수재 방지로 정부에서 쓰는 돈만 8조원이 넘습니다. 비가 많이 오면 하천 바닥이 높아지지 않습니까. 물이 저장되지 않고 바다로 빨리 빠져나가 버려 물길이 점점 좁아지는 거예요. 운하는 강 바닥에 쌓인 쓸데없는 퇴적물을 다 걷어내고 원래 강 길로 복원하는 국토 재창조 작업입니다.”

수백 년간 손질 못한 국토를 보수해 물길을 트고 국운을 일으키겠다는 거창한 꿈을 가지고 있었다.

“국회의원이 되기 전까지 저는 솔직히 군사독재를 반대하는 것에만 전념해왔지 군사독재를 청산한 다음 나라를 어떻게 복원하겠다는 비전이 없었어요. 그때 MB가 운하 얘기를 꺼낸 겁니다. 운하는 나라를 일으킬 동력이라 생각한 거죠. 제가 운하에 올인하는 이유는 절체절명입니다.”

전 국토를 재정비하는 사업을 비전과 꿈만 갖고 추진하긴 무리수가 따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그는 생태환경론자도, 토목기술자도, 환경경제학자 출신도 아닌 정치인일 뿐이다.

운하 전문가가 아닌 사람이 운하 전도사로 나섰으니 사람들은 의아할 수밖에 없다. 과학적이고 기술적으로 접근해야 할 운하를 그가 홍보하고 나서면서 운하를 정치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조심스럽게 ‘운하에 대해 얼마나 아느냐’ 는 질문을 던졌다.

“2시간이고 3시간이고 운하 얘기 하자면 저도 안 질 자신 있습니다. 12년 전부터 전문가들이 조사한 가능성에 대해 타진을 해왔고 그 결과를 보고 추진하는 겁니다. 무턱대고 정치적 목적으로 추진한다고 보면 오산이에요. 과학적이고 기술적인 부분은 전문가들이 하면 되는 일이고, 저는 연구 결과를 토대로 총괄적 방향만 잡아주는 겁니다. 미국의 에리 운하도 반대론자들의 저항 때문에 논의만 무려 30년 넘게 걸렸어요. 결국 오늘의 뉴욕주를 세계적 도시로 만드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치지 않았습니까.”

이경숙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은 운하 건설은 충분한 국민적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이 의원의 생각은 다르다. 논의는 필요하지만 실행하는 건 바꿀 수 없는 대세라는 강경한 입장이다.

“운하가 만들어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수치로만 따지면 경제성이 없다고 얘기할 수 있어요. 하지만 막상 운하가 완공된 후의 부가가치나 국민 전체에 미치는 심리적 효과, 나라 경제에 미치는 상승 작용 등을 생각하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수치는 무한대일 겁니다.”

그는 운하 완공 시기를 4~5년으로 잡았다. 임기 내에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민자 유치를 위한 사업자를 선정하고 전 국토를 뒤집는 건설에 4~5년은 긴 시간이 아니다.

“꼭 임기 내에 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공사가 그 정도 걸린다는 말입니다. 생각을 해보시오. 낙동강, 한강, 금강, 영산강을 잇는 운하 길 만드는 작업을 한 업체에서 합니까? 구간마다 나눠서 하는 겁니다. 게다가 없는 것을 새로 만드는 게 아니라 있는 강 길을 준설하고 다듬는데 무슨 시간이 걸려요? 충주에서 문경 새재 넘어가는 곳만 난코스인데 이것도 기술적으로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나라가 터널 뚫는 기술이 세계 최고입니다. 못할 것이 없어요.”

만약 1년이 지나도 국민 의견이 수렴되지 못했을 때 국민투표에 부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의 대답은 ‘노’였다.

이미 국민투표를 통해 뽑은 대통령의 공약을 놓고 다시 국민투표를 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는 것. 국민 의견 수렴 과정은 과정일 뿐 계획을 흔들 사안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이미 운하에 대한 로드맵은 만들어진 상태고 여기에 국민 의견을 물어 수정·보완하겠다는 계획이다. 늦어도 1년 후 착공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자전거 타면 뒤로는 못 갑니다”

“자전거는 제게 철학입니다.”

‘자전거’라는 말을 꺼내기 무섭게 나온 답변이다. 운전면허 없고 골프 못하고 술 못해 택한 자전거였다. 민중당 시절부터 지금까지 페달을 밟았으니 그 세월만 족히 14년이 넘었다.

그의 지역구인 은평구는 정치권에서 3대 ‘난공불락’ 지역이었다. 옛날부터 호남 사람들이 많아 영남 출신 후보가 되기 힘들고, 이사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 재선 하기가 힘들며, 개발이 늦은 서울 외곽지역이라 ‘야당’ 소속 의원이 국회의원 하기 힘든 곳이었다.

하지만 그는 96년부터 내리 10년간 이곳에서 국회의원을 하고 있다. 지난 ‘탄핵’ 바람에도 강북 지역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3선고지를 넘었다. 호남 유권자가 46%를 넘는 은평구에서 경북 출신의 그가 3선 의원까지 해낼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핵심 당적을 맡았던 기간을 제외하고 13년간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탔습니다. 제 선거구인 은평을 지역을 A~G의 7개 구역으로 나눠 매일 페달을 밟았죠. 일주일이면 지역구 11개를 거뜬히 완주할 수 있죠.”

해당 지역에 나타나는 시각이 거의 일정해 주민들은 그날이 무슨 요일인지, 시간은 몇 시인지를 짐작했다. 이를 두고 도올 김용옥 선생이 남긴 말이 있다.

‘이마누엘 칸트는 쾨니히스베르크(Knigsberg)의 태어난 곳에서 60마일 밖을 나가지 않고 살았다. 그리고 매일 어김없는 산보를 실천했다. 그의 산보시간이 얼마나 정확했는지 사람들이 그의 산보 모습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 그래서 ‘철학자의 산보’(Philosopher’s Walk)라는 별명이 생겨났다. 이제 우리는 ‘이재오의 산보’를 말해야 한다.’

“자전거는 후진이 없습니다. 내가 설 때까지 가는 겁니다. 지나치는 것들을 속속들이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지난 투쟁의 역사도 그렇고…. 앞으로도 자전거 철학을 따를 겁니다. 지역구 국회의원은 지역구에 자기 전부를 바쳐야 해요. 전봇대 하나에도 애정을 바쳐야 합니다. 우리같이 어려운 동네는 더 그렇죠. 주민들과 가까워지는 데 자전거만 한 것도 없어요.”(허허)

‘돈이 없으면 안 쓰면 된다.’ 이재오 머릿속에 있는 돈의 단상이다. 국회의원은 그 자체가 권력인데 돈이 뭐가 필요하냐는 주장이다.

그는 비가 새는 23평 한옥에서 30년 넘게 살고 있다. 대지 47평, 건평 23평. 84년 네 번째 감옥살이를 하고 나와 빚에 넘어간 집을 빚잔치로 산 집이다. 당시 평당 380만원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자리를 잡고 있어 개발 가능성도 작다. 집값이 오를 리 만무하다.

▶“한번은 강연료로 받은 100만원을 집사람에게 줬더니 첫 마디가 ‘이거 어디다 쓰라고?’였어요.”

국회의원의 월급은 세비(歲費)로 불린다. 3선 의원이나 했지만 이 세비 통장을 아내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매월 300만원을 생활비로 내놓는 것이 전부다. 나머지는 지구당 사무실에 내놓는다.

“집사람 소원이 국회의원 월급 통장 한번 보는 겁니다. 그러니 여윳돈이 들어와도 저나 집사람이나 어디다 쓸지를 몰라요. 한번은 강연료로 받은 100만원을 집사람에게 줬더니 첫 마디가 ‘이거 어디다 쓰라고?’였어요.” (웃음)

개인적으론 욕심 없는 돈도 국가 차원으로 확장되면 말이 달라진다. 풍족한 돈이 돌아야 국민이 편안해진다는 생각이다.

“홍콩이 왜 금융허브입니까? 외국 기업이 들어오면 편의를 다 봐주기 때문이에요. 대신 들어와서 공장 짓고 홍콩 사람 쓰라고 하지 않습니까. 영국이 홍콩을 99년간 관리했기 망정이지 중국이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의 홍콩이 있었겠습니까? 우리 새만금에 미국의 대기업이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호텔 같은 체인점을 떡 하고 지어 놓으면 일자리 창출되고 외국 관광객 와서 돈 쓰고 돈이 돌지 않겠습니까? 돈이 있으면 여유롭게 살 수 있잖아요. 이명박 정부가 자꾸 외국인 투자 유치를 말하는 것도 이 때문이에요.”

평화가 걸린 러시아 방문

이 의원은 인터뷰 틈틈이 러시아 방문과 관련한 메모와 전화를 받기 바빴다. 진수희 의원도 잠깐 들러 러시아 특사단 명단을 의논하고 돌아갔다. 한반도 대운하를 성사시키는 일만큼 그에겐 러시아 특사 역할도 막중하다. 극동 평화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북한 핵문제와 직결된 곳 아닙니까. 러시아에 가서 제가 할 일은 러시아와 한국이 합심해 북한 핵폐기를 유도하는 겁니다. 북한은 노동력을, 우린 자금을, 러시아는 유전을 제공해 3국이 동부시베리아 가스전 공동 개발에 참여한다는 계획이죠. 극동평화경제위원회를 만들자는 제안을 할 참입니다.”

이번 방문 때 동부 시베리아 유전 개발에 한국 기업이 참여하는 문제도 거론할 예정이다. 연해주 및 동부 시베리아 일대 독립운동 유적 복원, 기업인의 비자 간소화, 고려인의 지위 문제도 선물꾸러미로 들고 올 작정이다.

그는 최고의원직을 사퇴한 후 ‘토의종군’(土衣從軍)을 선언했었다. 온몸에 흙을 묻히는 험한 허드렛일을 하면서 이명박 후보의 대선 승리를 위해 전력하겠다는 뜻이었다. 대선을 20여 일 앞두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사람들을 만났다. 이때 그는 김구 선생의 도피처였던 충남 공주 마곡사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43년간 쉬지 않고 페달을 돌리다 멈추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던 밤이었죠. 적막한 절간에 심신이 피곤한 몸을 누이고 보니 그냥 모든 거 다 버리고 이런 곳에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국 그는 정치판으로 다시 돌아왔다. 세상을 바꿀 힘은 역시 정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한반도 대운하는 지금 그에게 세상을 바꿀 방법 1순위다.

박미숙 기자 splanet88@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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