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진화의 역설 “차 타면 불편, 걷는 게 편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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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도시를 내려다본 것 같은 영국 신도시 파운드베리(영국 남서부) 항공사진. 3층에서 5층 이내의 건물들에 다양한 기능이 혼재하도록 건축가 레온 크리어가 설계했다. 1단계가 완공되고, 현재 2단계 공사 중이다. 4단계까지 완공되면 전체 면적의 3분의 1은 녹지로 남겨질 예정이다. [콘월공작(영국 찰스 왕세자 작위의 하나)실 제공]

 경사진 붉은 지붕과 빛바랜 돌집들, 구불구불한 골목길, 마을 중심의 광장과 퍼브. 이달 초 찾아간 영국 남서부 도싯(Dorset) 지역 신도시 파운드베리의 모습이다. 조성된 지 5년 남짓한 장소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다. 오래된 영국 시골 마을 모습을 재현한 파운드베리는 옛것이 더 새로울 수 있다는 역설을 보여 주는 현장이었다.

(1월 22일자 8면 보도)

 국내에서는 수도권의 판교·광교 신도시를 비롯해 혁신도시 등 전국에서 도시개발이 한창이다. 그러나 어느 도시든 고층 아파트와 상업·업무빌딩 및 자동차 위주의 널찍한 도로 등 엇비슷한 모습들이다. 이처럼 용도에 따라 분리된 현대 도시는 인간적 친근감이 결여되고, 밤이면 인적이 끊어지면서 범죄가 늘어나는 등 부작용이 많은 것으로 지적돼 왔다. 이에 따라 1990년대부터는 인간 중심의 도시 만들기를 위한 ‘뉴어버니즘’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뉴어버니즘 운동은 도시에서 인간 중심의 옛 모습을 강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뉴어버니즘을 적용한 신도시들의 모습은 어떤지, 우리의 신도시와는 어떻게 다른지 비교해 보기 위해 현지를 취재해 5회에 걸쳐 연재한다.

 파운드베리는 뉴어버니즘 이론에 맞춰 찰스 왕세자가 건설하고 있는 신도시다. 철골과 유리 및 콘크리트 박스 일색인 현대 건축과 도시에 대해 지속적으로 비판해 온 찰스 왕세자는 89년 도싯 지역 도체스터 외곽 콘월 공작(Duchy of Cornwall) 영지에 신도시를 짓겠다고 발표했다. 옛 도시들처럼 여러 기능과 다양한 형태의 주거가 섞여 있는 보행 위주의 도시를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콘월 공작 영지란 1337년부터 영국 왕세자 소유로 계승돼 온 토지로 영국 23개 지역에 분포돼 있으며 파운드베리도 그중 하나다.

 도체스터는 기원전 축조된 토성과 마을 흔적에서부터 로마시대의 유적 및 중세 이후 근대까지의 흔적이 공존하는 소도시로, 문호 토머스 하디의 고향으로도 유명하다.

 마스터 플랜의 설계는 룩셈부르크 출신의 건축가이자 도시계획가인 레온 크리어가 맡았다. 크리어는 전통 건축과 도시 디자인의 중요성을 강조해 온 건축가다. 크리어의 설계에 따라 93년 착공한 파운드베리는 2002년 1단계를 완공하고 현재는 2단계 공사가 진행 중이며, 현 거주 인구는 1500명이다.

 이곳에서 민박집을 운영 중인 래니 폴은 “오래된 옷이 편하듯 옛 도시 같은 신도시가 양쪽의 편리함을 모두 갖췄다”고 말했다. 파운드베리 도로 설계를 담당한 이언 매그윅은 “자동차가 속도를 낼 수 없도록 70m마다 나무를 심거나 길을 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얼핏 들으면 옛날로 돌아가자는 이야기다. 그러나 이런 도시에 매력을 느껴 전문직 은퇴자들이 몰려들면서 땅값도 크게 올랐다. 파운드베리 주민회장인 프란체스카 리퍼는 “일부에서는 ‘왕세자의 장밋빛 꿈’이라고도 하지만 지난해 실시된 설문조사에서 89%의 주민이 파운드베리 생활에 크게 만족하는 것으로 응답했다”고 말했다.

파운드베리(영국)=신혜경 전문기자

◇휴먼 신도시=인간에게 친근한 도시를 만들자는 뉴어버니즘 이론에 따른 도시다. 이에 따르면 3~5층의 건물과 보행중심의 도시로 설계한다. 일터와 상점·주택이 함께 어우러져 자동차를 타고 먼 거리를 이동할 필요가 없는 도시 구조다. 또 주민들의 커뮤니티 의식을 높이도록 설계한다. 뉴어버니즘 운동은 미국의 안드레아스 듀어니 부부와 피터 칼솝 등이 1980년대 후반부터 주장하면서 세계적으로 탄력을 받고 있다. 이들은 널찍한 녹지 한가운데 우뚝 선 고층 빌딩을 배치하는 코르뷔지에식 도시는 인간을 소외시킨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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