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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 Movie TV] 내가 눈을 뜨면… 소지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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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면

어라, 이 남자가 웃네. 이렇게 부드럽게 웃을 줄 아는 남자였나. 눈꼬리를 살짝 내리고 그저 입가에 배시시 웃음을 흘렸을 뿐인데도 그 어떤 남자의 호탕한 웃음소리보다 훨씬 '위력적'이다. 누군데 이렇게 호들갑이냐고? 주말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SBS)에서 세상 참 가소롭다는 듯 내리까는 눈빛 하나로 전국의 여자들을 녹이고 있는 소지섭(27) 얘기다.

드라마는 벌써 16회를 넘겼지만 극중에서 소지섭이 환하게 웃는 모습은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없다. 말 한마디 없이 눈을 비껴뜨며 상대를 조롱하는 특유의 비웃음이나, 머리 끝까지 올라온 화를 참느라 지그시 다문 입에서 한숨처럼 새어나오는 실소가 전부다. 그런데도 이 남자는 비열하거나 비굴하다고 욕먹지 않는다. 오히려 "오죽했으면… 얼마나 마음이 아팠으면…"하는 인간적인 연민과 공감을 이끌어낸다. 그게 소지섭의 매력이고 인기의 비결이다.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이심전심 보여줄 것 다 보여주는.

비교적 긴 휴식 끝에 고른 '발리에서 생긴 일'은 대사가 적다고 만만하게 볼 작품이 결코 아니었다. '천년지애'(SBS.2003)에서 함께 작업했던 김기호.이선미 작가의 작품이라 일단 믿음을 갖고 달려들기는 했지만, 작가조차 "대사도 없고, 행동도 없고, 눈으로만 말해야 한다"면서 "힘들 것"이라고 진작에 경고할 정도였으니. 그러나 소지섭은 "너를 미워한다" "너를 사랑한다"는 대사 한줄 없이, 고래고래 소리치거나 울부짖는 행동 하나 없이, 그야말로 눈짓 하나로 가진 것이라곤 야망밖에 없는 인물 강인욱의 상처와 사랑을 너무나 잘 소화해냈다. 흠잡을 데 없는 외모에다 운동선수(수구) 출신답게 균형잡힌 체형 덕을 보는, 많고 많은 '꽃미남' 청춘스타 중의 하나에서 이제야 비로소 제대로 된 연기자 한 사람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고나 할까.

물론 이선미 작가는 '천년지애'때부터 "이 작품을 통해 소지섭이라는 배우를 발견한 게 가장 큰 수확"이라며 일찍이 소지섭을 높이 평가했지만, 시청자들은 당시 모델 출신 김남진의 발견을 더 큰 수확으로 여기는 분위기였으니까. 하지만 이번엔 시청자들도 소지섭의 매력에, 그리고 소지섭의 연기력에 새롭게 눈을 뜨기 시작했다.

애증이라는 단어의 정의를 보여주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듯 '발리에서 생긴 일'의 캐릭터들은 모두 단선적이라기보다 다면적이고 복잡미묘한 성격이다. 인욱을 사랑하지만 돈 많은 재벌 2세 재민(조인성)의 품 안에서 그의 인형으로 전락하는 수정(하지원)이나, 재민을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오기와 자존심으로 재민과 결혼하려는 유력한 집안의 딸 영주(박예진), 수정에게 집착하지만 "결혼만 빼놓고 원하는 건 뭐든지 해주겠다"는 재민이 모두 그렇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인욱은 이 두가지 감정이 더 빈번하게 교차한다. 미치게 보고 싶던 수정이 막상 울먹이며 "보고 싶었어요"라고 고백해도 뒤돌아서 수정을 와락 안아주는 대신 싸늘한 목소리로 "그래서 어쩌라고"라며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수정 옆을 스쳐 지나간다. 사랑하지만 다가서지 못하고 이렇게 상처만 주는 인욱 역을 소지섭 아닌 그 누가 이렇게 잘 표현해낼 수 있을까.

그런데도 정작 소지섭 본인은 "연기할 때 항상 이런 두가지 감정, 생각은 이쪽으로 향하는데 막상 행동은 정반대로 해야 하는 애증을 표현하기가 어렵다"며 "제대로 전달되는지도 잘 모르겠다"고 자신없어 했다. 또 "인욱이 실제 내 성격과 너무 닮아 연기하기가 더 어렵다"고도 말했다. 그의 말마따나 소지섭은 홀어머니의 아들이라는 환경까지 빼다 박은 듯 인욱과 비슷하다.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고 말이 없는 과묵한 인욱의 성격도 딱 소지섭 그대로다. 강산도 변한다는 10년 가까이, 더욱이 사람의 근본까지 통째로 바꿔버린다는 연예계에 머물면서도 이 남자는 여전히 남 앞에 나서기 싫어하며 '내성적' '비사교적'이라는 단어를 달고 다닌다. 친한 연예인 목록에도 벌써 몇 년째 송승헌.권상우.박용하 이외의 이름을 추가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연기 얘기만 나오면 눈을 반짝이며 평소보다 더 진지해지는 그이지만 애써 "연기는 내 천직이 아닌 것 같다"며 수줍어하는 이유가. 작품을 띄우기 위해서라면 오락 프로그램에서 한번쯤 망가지기도 해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걸 못하기에, 아니 안하기에 혹시 연예계의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건 아닐까.

그러나 "탤런트 손현주의 현실적인 연기가 좋다"며 "나이 먹으면 그런 연기를 하고 싶다"는 그의 말에서 연기자 소지섭의 가능성을 본다. 기분좋게 나이 먹은 소지섭을 그려보면서.

글=안혜리 기자

사진=권혁재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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