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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레카2000>15.재봉틀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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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다르르 연하게 구르는 재봉틀 소리가 달콤하니 졸음을 꼬인다.」(채만식의 『탁류』에서) 50~60년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중년층에게는 희미한 전깃불 아래 손재봉틀을 달달 돌리면서 옷을 짓고 있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잠을 청한 기억들이 남아 있다. 기능보다도 향수어린 추억들로 더 잘 떠오르는 재봉틀은 경제적으로 힘들었던 그 시절 가족의 생계를 돕는 주부들의 필수품으로 자리잡았고 「꽃님이 시집갈 때 ○○○미싱」이라는 광고 카피처럼 예비신부들의 혼수품 목록 1호로 인식되기도 했 다.
일제시대에 처음 들어온 재봉틀은 당시 워낙 귀해 집안의 가보처럼 쓰이다 65년 日브라더공업과 합작해 설립된 ㈜부산정기가 국내생산을 시작하면서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초창기의 기계공업을 선도한 재봉틀산업은 66년 국내 최초로 지그재그 재봉틀이 서독에 수출되면서 유일한 수출용 생산기계산업으로 각광받기도 했다.
애초 손바느질의 기계화에 대한 시도는 17세기께부터 영국과 독일을 중심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바느질이라는 복잡한 운동의 기계화는 쉽지 않아 거듭된실패끝에 1755년 미국의 발명가인 찰스 T 위센달이 2중바늘을 개발하면서부터 재봉틀의 발명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이후 재봉틀은 인간의 3대 필수품인 의.식.주의 하나인 의류를 대규모로 생산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가사노동에서 여성들을 해방시켜 산업인력의 증가를 가져왔다.
최초의 특허는 1790년 영국의 가구상 토마스 세인트가 획득했다.그의 기계는 송곳으로 가죽에 미리 구멍을 뚫고 그 구멍에실을 넣었다 끌어들여 재봉하는 방식으로 뜨개질에 사용하는 코바늘을 쓴 조잡한 것이어서 실용화되지는 못했다.
최초의 실용적인 재봉틀은 1829년 프랑스의 재봉사 파세렘 시모니에 의해 발명됐는데 당시에는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운동)의표적이 돼 수난을 겪었다.
바퀴에 연결돼 오르내리는 축에 2중바늘을 단 그의 기계는 나폴레옹시대 프랑스군의 군복을 대량생산하기 위해 쓰였다.
그러나 기계가 그들의 일을 빼앗을 것을 두려워한 성난 재봉사들이 그의 공장을 두번이나 공격,기계를 태우고 부숴버리는 등 난동을 부려 결국 공장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엘리어스 하우도 1846년 자신이 만든 박음질 재봉틀을 판매하려다 보스턴 재봉공들의 시위때문에 판매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공장직공이었던 하우는 아내가 삯바느질로 생계를 돕는 모습이 안쓰러워 연구를 시작,5년간의 노력끝에 발명에 성공했지만 이런이유로 미국판매에 실패해 영국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영국에서도 판매에 성공하지 못한 하우는 알거지 신세가돼 결국 돌아갈 여비 마련을 위해 의류상 윌리엄 토머스에게 특허를 파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했고 그후 재봉틀 붐이 일면서 토머스는 백만장자가 됐다.
오늘날처럼 발달한 형태의 재봉틀은 미국 가구상인 앨런 윌슨이하우의 재봉틀을 개선,직물을 바늘의 움직임에 따라 전진시키는 톱니이송장치를 개발해 바느질 속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하면서부터 그 기틀이 마련됐다.
***현재 최대생산국은 中國 산업용으로만 인식됐던 재봉틀을 가정에 보급시킨 사람은 아이작 싱거였다.그는 재봉틀 개량에 몰두하고 있던 어느날 밤 중간쯤에 구멍이 있는 창(槍)을 휘두르는 기사의 꿈을 꾸고 여기에서 힌트를 얻어 최초의 가정용 재봉틀을 생산했다.
1851년 특허를 획득한 그는 나중에 세계 최대의 가정용 재봉틀 생산회사가 되는 싱거사를 설립했다.
오늘날 재봉틀은 의류생산의 공업화에 따라 전문화.세분화.자동화돼 그 종류가 무려 5천種을 넘고 있으며 캐드(CAD)시스템과도 연결돼 자신이 원하는 디자인대로 바느질할 수 있는 기계까지 나온 상태다.
세계최대의 재봉틀 생산국은 중국.우리나라는 연간 15만대 정도의 공업용재봉틀을 생산하고 있으며 가정용은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朱宰勳기자 ◇도움말=부라더상사(株)기술지도부 박경두(朴慶斗)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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