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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를 부르지 않는 선수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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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예, 참 보기 좋은 장면이지요. 브라질이나 이탈리아 같은 축구 강국에서는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서 국가를 부르는 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생각하거든요. 98 프랑스 월드컵 당시 프랑스 우익 진영에서는 식민지 출신 흑인 선수들이 대표팀에 많이 뽑히니까 “라 마르세예즈(프랑스 국가)도 못 부르는 선수들을 어떻게 국가대표라 할 수 있나”라면서 반발한 적도 있어요.

-그렇군요. 국가를 부르는 모습도 다양하죠. 멕시코 선수들은 손등을 위로 해서 가슴에 대는 독특한 경례를 하면서 부르던데요.

-예, 어깨동무를 하고 부르는 선수도 많죠.

-자, 이제 애국가가 연주되겠습니다. 왼쪽 골대 뒤 붉은 악마 응원석에서 대형 태극기가 올라갑니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애국가를 따라 부르는 선수가 한 명도 없습니다.

-네∼, 절반은 기도하는지 눈을 감고 있고요. 나머지는 눈에 잔뜩 힘을 주고 태극기하고 눈싸움만 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저런 걸까요. 너무 긴장해서 그런가요.

-그렇다고 봐야죠. ‘축구는 전쟁이다’는 표현도 있지만,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병사들처럼 ‘꼭 이겨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저렇게 긴장한 상태에서 경기를 시작하면 아무래도 초반에 좀 경직되지 않겠습니까.

-글쎄요. 노래를 안 불렀다고 해서 경기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겁니다. 다만 우리 선수들이 그만큼 여유가 없다는 거죠.

-국가를 부르기 때문에 릴랙스된다기보다는 여유가 있으니까 국가도 부를 수 있다, 이 말씀이네요.

-맞습니다. 축구선수 출신으로 스포츠심리학을 전공한 윤영길 박사가 한국체대에 계시는데요. 그분이 이런 얘기를 했어요. “우리 선수들이 이렇게 경직된 것은 육성 과정에서 생긴 문제다. 한 번 지면 탈락하는 토너먼트 대회에서, 결과가 나쁘면 구타와 체벌이 따라오는데 누가 즐겁게 경기장에 들어서겠는가”라고요.

-듣고 보니 일리가 있네요. 참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서울시립대에 계시는 소프라노 유미자 교수님 얘기도 해드리죠. 저희 축구사랑 모임에서 연말 송년회를 했는데요. 그분이 좁은 중국식당 방에서 스무 명 정도를 앉혀놓고 무반주로 가곡 다섯 곡을 열창하셨어요. 그러고는 “저는 프로입니다. 클래식 음악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게 좋아서 이런 데 오는 게 진짜 즐겁습니다” 이러시더라고요.

-참 대단한 분이시네요. 그런데 그게 축구랑 상관있는 얘깁니까.

-들어 보세요. 제가 “애국가를 안 부르는 대표선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물어봤어요. 유 교수님이 “긴장하는 것과 집중하는 건 다릅니다. 진정한 프로라면 경기장에 나서는 것 자체가 신나고 즐거워서 펄쩍펄쩍 뛰어야죠” 하셨어요.

-아하, 그러니까 음악이든 축구든 자신의 일을 즐겨야 진정한 프로다, 이 말씀이네요.

-맞습니다. 직장 일도 마찬가지죠. 아무리 힘든 프로젝트가 떨어져도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위축되지 말고 ‘내 능력을 보여줄 기회다’ 생각하면 집중력도 생기고 결과도 좋아진다는 겁니다. 세상은 마음먹기 따라서 전쟁터가 될 수도 있고, 놀이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와우, 오랜만에 멋있는 멘트를 하셨네요. 그나저나 30일에 한국 대표팀이 칠레와 올해 첫 경기를 갖는데요. 그날 우리 선수들이 애국가를 부를까요 안 부를까요. 저랑 내기하실래요?

-아무도 안 부른다에 5만원 걸겠습니다.

-앗, 제가 먼저 그쪽에 걸려고 했는데….

정영재 문화스포츠부문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