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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길 떠나는 영화 ⑤ 홍상수의 <해변의 여인>

중앙일보

입력

걷기, 그 세밀한 상상력에 대하여

칼이란 친구가 있다. 영화잡지 <프리미어>를 자주 본 사람이라면 칼 로즈메이어라는 특이한 이름에 익숙해 있을 것이다. 그는 미국 프리미어닷컴의 기자로, 내가 몸담고 있는 잡지에 생생한 할리우드 기사를 써주고 있는 친구다. 얼마 전 그에게 새해를 맞이해서 선물을 보내고 싶다고 연락했더니, 이내 홍상수 감독을 좋아한다면서 <해변의 여인> DVD타이틀을 요청하는 답변 메일을 보내왔다. 프랑스가 아니라 미국에서 홍상수라? 그러나 칼이 이 영화에 관심을 보이는 건 갑작스런 일은 아니다. 국내에선 그리 화제가 되지 않았지만, 1월 9일자 뉴욕타임스에는 고현정의 스틸 사진이 실렸다. 왜냐하면 <해변의 여인>이 뉴욕 시네마테크인 필름 포럼에서 개봉했기 때문이다. ‘비평가의 선택’이란 부제를 달고 말이다. 미국판 프리미어에서는 “자기파괴와 집착, 배신, 위선에 대한 솔직한 해석이 돋보인다.”라고 극찬을 던졌다. 알다시피 이 영화는 고현정 이펙트에도 불구하고 국내에서 평단이나 흥행에서 이렇다 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젠 일반 사람들에게 홍상수 영화는 ‘홍상수식 영화’라는 소수(마니아적 꼬리표)를 위한 작업으로 인식된다. 한때 영화 평단에 의해 작가로 ‘발견’되었던 홍상수는 어느새 지독하게 왜곡되고 소외된 감독이 되고 말았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홍상수 배우들의 걷기(발걸음)를 보고 있노라면 20세기 프랑스 사상가 폴 발레리의 말이 생각난다. 걷기가 “세상, 정신, 몸 사이에 존재하는 삼각관계를 다시 활성화시킬 수 있다”고 했던 단언 말이다. 소심함과 경솔함의 모래로 가득 찬 <해변의 여인>은 사람들이 어떻게 감정을 드러내며 걷고 있는가를 허심탄회하게 보여준 영화다.

만약 <해변의 여인>이 뉴욕의 시네필들에게 인기를 끈다면 그들은 극장을 박차고 나와, 우디 앨런과 또 다른 방식으로 맨해튼의 강변을 거닐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질펀하게 취한 뉴요커들이 손에 소주를 들고 돌아다닐지도. 흔히 홍상수 영화는 한국영화에 보기 쉽지 않았던 일상성(동시에 현대성)과 지식인의 속물근성을 비판하는 시선으로 찬사를 받았다. 그는 자신을 희화화할 정도로 지식인의 양면성을 비웃는다. 그 속에서 인간의 욕망, 집착, 가벼움이 끝없이 베어 나온다. 독특한 사실은 홍상수의 분신이나 다름없는 캐릭터들이, 그들의 발걸음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직접적으로 감정을 표현한다는 점이다. 홍상수의 인물들을 슬쩍 떠올려보자.

<생활의 발견>의 경수(김상경)는 유부녀 선영(추상미)을 유혹하기 위해 겁 많은 소년처럼 그녀의 집 앞을 서성거린다. 심지어 놀라서 도망가기 일쑤다. 결국 지칠 줄 모르는 그의 호기심과 욕망은 ‘성(性)’생활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극장전>의 동수(김상경)도 영화배우 영실(엄지원)과 섹스를 하고 싶어 미치도록 치근거린다. 참으로 딱할 정도다. 기어코 그녀와 섹스를 하면서 그는 영화 속 주인공 같은 쾌감을 누린다. 그러나 사내들은 도망치듯이 그녀들을 버리고 나오면서, 한 가지 답(변명)에 이른다. “이렇게 살면 안 돼! 생각을 해야 해!”라고 자신에게 속삭인다. 그들의 빨라진 발걸음엔 자기 파괴적인 위선의 그림자가 달라 붙어있다. <해변의 여인>의 영화감독 중래(김승우)도 다를 게 없다. 후배의 애인 문숙(고현정)을 빈 펜션으로 끌고 들어가 밀애를 나눈다. 중래가 문숙과 즐길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 거니는 모습은 아이처럼 우스꽝스럽고 경솔하다. 게다가 육체적 관계를 즐긴 후엔, 겁을 집어먹고 도망치기에 분주하다. 한마디로 음흉한 이들은 어슬렁거리는 욕망의 발걸음을 지녔다. 걷기는 때론 그런 불온한 감정마저 잊지 않고 포착한다.

19세기말 무렵, ‘걷기’의 새로운 정의를 내렸던 낭만주의자들을 오늘날 이 땅에 초대한다면, 유유자적한 홍상수의 행태를 보여 줄게 분명하다. 그들은 보행자가 열정을 가슴에 품고, 자신의 산책을 자연과 직접 접촉하는 수단으로 만들도록 특권화시켰다. 자연과 세계와 자아를 체험할 수 있는 고상한 수단으로 그 가치를 급상승시킨 것이다. 더불어 홍상수의 실제 삶에서도 산책하며 사유하는 페리파토스(소요철학자)의 자태를 엿볼 수 있다. 그는 언제나 웃옷 포켓에 커다란 메모지와 펜을 넣고 다닌다. 마치 자신의 트레이드마트처럼. 한 때 영화감독 지망생이던 학생들이 이런 모습을 쫓아하기까지 했다.
2006년 8월초, <해변의 여인>인터뷰를 위해 홍상수 감독을 잠시 만난 적이 있었다. 그에게 촬영을 위해 잠시 펜을 빼달라는 요청을 했지만, 자신의 일부를 분리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완고히 거부했다(영화 속 중래처럼 홍상수는 자주 그림을 그려 자신의 생각을 설명한다). 인터뷰 전 짬이 잠시나자, 그는 놀이터에 앉아 사색을 즐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그만의 산책법이 존재했다.

<해변의 여인>은 서해안 신두리 해변을 무대로 펼쳐진다. 중래 일행을 빼고 나면, 이곳은 인적 드문 땅이다. 적어도 신두리 사람들에게 이 해변은 사색의 공간이 아니라 일상적인 삶의 터전이다. 해변을 거니는 일은 오직 도시인을 위한 산책이다. 여행을 온 이들이라면 누구나 선택할 수밖에 경험! 홍상수는 여기서 이들의 감정을 대변하는 소통수단을 찾아낸 셈이다. 그리고 철부지 수컷의 한계를 깨달을 듯,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라는 결론을 내놓는다. 여기서 <네이키드>의 데이비드 듈리스처럼 심하게 절뚝거리지 않지만, 중래는 다리를 다쳐 제대로 걸을 수 없는 처지에 놓인다. 그는 더 이상 해변을 거닐 수 없다. 오히려 모든 마무리는 문숙의 몫이다.
홍상수 영화에서 항상 여성은 대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중래가 떠나고 남은 자리에 혼자 남은 그녀가 놀랍게도 주체가 된다. 홍상수의 영화는 이번에는 에릭 로메르가 아니라 루이스 브뉘엘에 가깝다. 로메르의 <클레르의 무릎>처럼 홍상수는 고현정의 발에 필이 꽂힌다. 잘 걸을 수 있는 예쁘고 건강한 발(해변의 첫 장면)이다. 물론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선다. 스스로 욕망하게 그녀의 시간을 남겨둔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방랑시인처럼 술에 취한 문숙이 어두운 숲 속을 거니는 장면이 이를 대변한다. 그리고는 난데없이 “도마뱀, 도마뱀, 무슨 일이든 척척해낸다”라고 노래를 부른다. 만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나오던 친숙한 노래의 한 구절 말이다. 그녀는 어둠을 뚫고 돌아와 “사실대로 말해줘”라고 진실을 요구한다. 중래가 실체와 이미지에 대해 개똥철학을 논한다면 용감한 그녀는 미지의 시공간을 직접 발로 경험한다.

도시는 물론이고 해변에서도 홍상수의 걷기는 ‘차이와 반복’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의 태도는 편견과 경계를 깨뜨리는 작업에 서있다. 어떤 순간에는 불경스런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서슴지 않는다. 현실에서 한발 떨어진 홍상수식 걷기에 젖어들다 보면 사물을 바라보는 법이 자연스럽게 바뀐다. 그는 해변을 떠나 지금 멀리 파리로 날아가 있다. 최신작 <밤과 낮>에서 서울에서 파리로 도피하게 된 40대 화가의 기이한 여행 이야기를 그린다. 홍상수식 여행기가 또 다른 궤도에서 펼쳐지고 있다. 그의 걷기를 심리적 잣대로 체감한다면 그의 영화는 ‘판타지적 리얼리즘’이다. 언제나 환상과 사실이 공존한다. 그것은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다. 그러나 홍상수는 그 양립할 수 없는 두 축을 걷기라는 행위로 결연시킨다. 그가 거닐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데는 많은 상상력이 필요 없다. 그저 해변으로 떠나는 일로 충분하다. 거기서 알게 되리라!(*)

글_전종혁 프리미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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