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샌드위치 나라의 생존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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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베니아는 작은 나라가 아니다.”

슬로베니아 현장 취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 가운데 하나다. 슬로베니아에는 말 그대로 자신과 활기가 넘쳐 났다. 언뜻 생각해 보면 슬로베니아가 내세울 것은 많지 않아 보였다. 나라도 작고 인구도 200만 명에 불과하다. 자원이 많은 것도 아니다. 더구나 슬로베니아는 ‘샌드위치’ 나라다. 내로라하는 부자 나라 서유럽 국가들이 왼쪽에 즐비하다. 오른쪽으로는 나름대로 힘깨나 쓰던 동유럽의 강대국들이 버티고 서 있다.

도대체 슬로베니아는 뭐로 동유럽 붕괴의 혼돈을 극복해 이런 자신감을 갖게 됐는지가 궁금했다. 해법은 기업이었다. 슬로베니아는 1991년 독립 후 국영기업을 대거 민영화했다. 그리고 이들이 알아서 살길을 헤쳐나가도록 자율권을 충분히 보장했다. 민영화한 기업들은 자생력을 갖추면서 규모를 키웠다. 그러자 이들 기업과 협조 관계에 있는 중소기업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독립 후 5년간 기업이 무려 60%나 늘어났다. 이후에도 슬로베니아 정부는 단계적으로 법인세 인하 등 기업 하기 좋은 환경을 만드는 데 최근까지 주력하고 있다.

정부의 기업 살리기는 고스란히 국가 경쟁력으로 돌아왔다. 일례로 슬로베니아는 1월부터 유럽의회 순회의장국을 맡으면서 기업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 슬로베니아 23개 기업은 의장국 기간에 열리는 130여 개 행사를 위한 상품 또는 서비스를 제공한다. 직접 돈을 내고 협찬 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리기도 한다. 이들 기업은 다시 전 세계에 자사를 홍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투입한 돈보다 훨씬 더 큰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나라와 기업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만 결국은 서로에 큰 힘이 되는 ‘윈윈 전략’이 성립하는 것이다.

지정학적인 샌드위치 현실도 잘 활용하고 있었다. 동·서 유럽을 잇는 활발한 중개 무역과 함께 물류의 허브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것이다. 또 슬로베니아 기업들은 동유럽 국가의 값싼 노동력과 서유럽의 큰 시장을 적절히 활용하고 있었다. 바로 이게 가진 것 없고 땅덩어리도 작은 샌드위치 나라가 살아남는 법이었다. 세계 질서를 쥐락펴락하는 중국과 경제 대국 일본 사이에 끼여 있는 우리이기에 슬로베니아의 해법은 더욱 고개를 끄덕이게 만든다. 샌드위치 현실이 마냥 걱정할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전진배 파리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