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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솜의 역사가 인간의 역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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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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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오르세나 지음, 양영란 옮김, 황금가지
320쪽, 1만3000원

세계문명사는 동방의 비단이 서방에 전해진 길을 따라 정리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계사는 기껏 솜 뭉치 따위로도 새로 쓸 수 있다. 지은이에 따르면 세계사는, 솜이라 불리는 하얀 꽃송이의 전파와 쟁탈의 역사다. 서양사에서 솜은 기원전 326년에 처음 등장한다. 알렉산더 대왕의 동방 원정 때다. 이후 십자군 원정을 거치며 유럽에서도 목화가 재배된다. 18세기 영국의 식민지 정책에서도 목화는 결정적 역할을 한다.

영국은 당시 귀족사회의 유행 코드가 된 무명 옷의 안정적 확보를 위해 식민지 미국의 북위 37도 이남 지역 모두에 목화를 심는다. 그 광활한 목화밭에 노동력을 공급하기 위해 노예제도가 도입된다. 아시아에서 시작한 목화의 세계사가 유럽과 아메리카를 거쳐 급기야 아프리카까지 확대된 것이다. 미국의 남북전쟁, 영국의 산업혁명에서도 목화는 빠뜨릴 수 없는 핵심 요인이었다.

그러면 목화의 세계사는 이제 종결된 것인가. 지은이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합성섬유에 밀렸다 해도 면 섬유는 여전히 전 세계 섬유시장의 40%를 차지한다. 지폐·화장품·치약·식용유·비누·비료, 심지어 플라스틱의 원료로도 목화는 동원된다. 목화의 다목적 가치를 알아차린 대기업이 가만히 있을 리 없다. 대기업은 목화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특별 연구에 착수한다. 이에 따라 오늘날 지구에서 재배되는 목화의 3분의 1 이상은 유전자가 변형된 것이다. 목화는 현재 전 세계 환경문제의 핵심 이슈 중 하나다. 목화를 둘러싼 각축이 여전히 진행 중이란 사실을 지은이는 전 세계를 돌며 중계한다. 나라 전체가 필사적으로 목화 생산에 매달리는 서부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말리의 목화 재배지를 찾아가고, 전 세계 목화 수출액의 40%를 차지하는 목화 강대국 미국의 대농장도 방문한다. 중국·브라질·우즈베키스탄·이집트의 목화밭도 기꺼이 들러, 목화의 세계화 현장을 증언한다.

경제학적 식견과 인문학적 문장이 잘 어울린, 고급스럽고 흥미로운 저작이다.

손민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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