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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2면

왕년의 악동들이 다시 모인 건 시월의 토요일 오후였다.
상원이 위주로 시간과 장소를 정하는 데에 다른 악동들이 모두동의한 거였다.상원이의 시간표에 의하면 주말 오후만이 자유시간으로 활용할 수도 있게끔 돼 있다는 거였다.우선 상원이가 다니는 재수학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당구장에서 그동안 저마다갈고 닦은 실력들을 겨루었다.노량진의 나인 당구장이었다.
유쾌한 시간이었다.편을 먹고 내기당구를 쳤는데 영석이와 내가같은 편이었고,승규와 상원이가 한편이었다.영석이와 승규가 각각2백을 놓았고 나와 상원이는 고3 때 실력 그대로 각각 백50씩이었다.영석이와 승규는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향상돼 있어서 상원이와 나를 주눅들게 만들었다 『상원이는 공부를 열심히 했다고 치고…달수 넌 그동안에 당구도 안치고 뭐한 거야? 써니도 없는데….』 『달수 잘 나간다는 거 소문도 못들었냐 너흰.무슨탤런튼가 하던 애하고 둘이서 당구를 치겠느냐구.치면 딴 걸 치지.』 악동들이 자기들끼리 낄낄거리면서 좋아했다.영석이는 한번에 다섯 여섯점씩 쳐대면서 허슬러같은 폼을 잡기도 하고 그랬다.빨어… 벗겨… 돌려… 찍어… 오랜만에 악동들끼리 모이니까 서로 아무 말을 해도 재미있고 그런 건 사실이었다.
상원이가 삐삐를 치고 그러더니 결국 덕순이가 당구장으로 왔다.덕순이는 눈가와 입술에만 옅은 화장을 했는데 여대생 티가 풀풀 풍겼다.
『아니 떡순이가 여긴 웬 일이야.』 악동들이 덕순이와 서로 악수를 나누는데 상원이가 한마디했다.
『형수님한테 떡순이가 뭐야 이것들아.예의범절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지는 거 몰라.』 그때부터는 덕순이가 게임을 봤고,마침내 스리쿠션에서 우리편이 상원이네를 잡아서 역전승을 거뒀다.
당구장을 나와서는 영석이의 프라이드에 다들 구겨타고 압구정동으로 몰려갔다.성수대교가 끊어진 다음부터 압구정동에 손님이 줄었다느니,그게 아니라 지존파 사건의 후유증이라느니 해가면서 레몬소주를 벌컥벌컥 마셔댔다.
하여간 악동들 가운데서 상원이가 가장 점잖고 어른스러워보인 건 사실이었다.덕순이가 옆에 버티고 있어서 그렇게 보였는지도 몰랐다. 『며칠 전에 양아를 만났어.』 내가 말을 꺼냈더니 모두들 한마디씩 해댔다.
걔 아직 살았어?야 어떻게 걔가 연극영화과엘 갔느냐구.이건 말도 안돼.임마,리얼리티를 살리려면 그렇게 생긴 애도 영화에 나와야 하는 거 아니냐구.양아 걘 숫처녈 걸 아직도.
『갑자기 양아가 날 찾아온 것도 이상하지만… 하여간 써니가 살아 있는 것 같아.정말이야.느낌이라는 거 있잖아.아니 느낌 뿐이 아니라구.이상한 전화도 많이 걸려오거든.얼마 전엔 학교 앞에서 말이야,써니 같은 애가 길건너에 서 있어서 쫓아갔는데 놓치고 말았어.』 한동안 아무도 입을 열지 않고 다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이라니까.너희들이라도 날 믿어줘야 한다구.』 악동들과 덕순이의 눈빛은… 뭐랄까 날 긍휼히 여기는 눈빛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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