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달아 높이곰 돋아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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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정읍사(井邑詞)⑮ 『옛날 필법엔 묘한데가 있죠?「세상에 전하기를…」이라든가,「일설에 의하면…」이라든가 하면서,사실과 소문과 자기 생각까지를 두루뭉수리로 엮는 방법 말예요.』 김사장이낭독하는 것을 듣다 아리영은 말했다.
『객관적으로 쓰느라 노력한 결과인지도 몰라요.어떻든 그런 기술방법이 당시의 사정을 연구하는 좋은 소재가 돼주니 오히려 고맙죠.그리고 전설 같은 얘기들이 의외로 역사적인 사실을 말해 주고 있는 경우도 많구요.』 서여사는 망부석(望夫石)에 「발자취」가 있다는 점에 관심을 보였다.만약 망부석이라는 바위가 정말 존재한다면,그것은 여인의 발자취가 아니라 당시 다른 용도로만들어진 인위적인 자취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이를테면 제사를 지낸 제단 흔 적이었다는가….
『지금도 그 망부석이라는 바위가 남아 있습니까?』 길례의 질문에 김사장이 대답했다.
『망부석이 있었다는 자리 자체를 아직까지 확실하게는 찾아내지못한 것 같습니다.
옛날부터 망부석은 정읍의 덕천(德川)에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있어서 어떤 학자분이 한번 답사했었답니다.덕천면에는 망제리(望帝里) 비럭골이라는 마을이 있는데,그 곳에 「여시바우」라는큰 바위가 가로놓여 있다는군요.왕릉같이 큰 묘 여러개가 주변에있었다고도 하고요.그리고 그 묘터로 해서 산을 올라가면 망제봉(望帝峯)이라는 정상에 닿게 된답니다.』 『망제(望帝)라면 「임금을 바란다」는 뜻인데,지금까지의 「정읍사」로 해석에 의하면「남편을 바라는」노래로 돼있지 않습니까?』 길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노트를 뒤졌다.
『아까 김사장님께서 읽어주신 「정읍사」의 내력과 꼭 같은 기록이 「고려사」악지(樂志)에도 실려 있어요.「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조 중종 25년인 1530년에 나온 책이고,「고려사」는그보다 앞선 1451년에 나왔으니까,「고려사」의 기록을 「신증동국여지승람」이 인용했다고 봐지지 않겠습니까?』 『옳은 지적이에요.』 서여사가 끄덕였다.
『그런데 참 이상해요.노래엔 「행상」(行商)이니 「남편」이니「아내」니 하는 귀절은 일절 없는데,「고려사」의 저자는 어째서행상을 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노래로 단정해 버렸을까요? 임금님을 바라며 부른 노래로도 볼 수 있지 않 겠어요?』 황토현 산마루에서 맵싸한 바람이 억새를 쓸고 반짝이며 내려온다.
올리브색 오리털 점퍼에 걸친 머플러로,길례는 아무렇게나 머리를 쌌다.거무스레한 얼굴이 오렌지빛 머플러 테두리 안에서 노루처럼 생기있어 보였다.
「일」이,중년여성을 한결 돋보여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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