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검은 재앙’ 그 후 한달의 기적 … 태안 르포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1면

충남 태안 앞바다에서 기름 유출 사고가 발생한 지 한 달이 지난 6일. 만리포해수욕장에서 ‘바다 갯내음’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검은색 백사장은 모래 빛을 되찾았다. 고무 물통으로 원유를 퍼내던 한 달 전만 해도 “모래가 다 없어져야 기름도 사라질 것”이라고들 했다. 그 후로 하루 수천 명의 자원봉사자가 해수욕장을 찾았다. 그들이 찾을 때마다 백사장은 조금씩 자기 색깔을 찾아갔다.

 한 달 전, 이곳은 기름 범벅이었다. 겨울 북서풍은 기름띠를 해안으로 밀어붙였다. 해수욕장·항구·갯벌은 검게 변했다. 해안과 7~8㎞ 떨어진 소원면 입구까지 악취가 퍼져갔다. 도로에 아스팔트를 새로 까는, 그런 냄새였다.

상가를 운영하는 김봉영(65)씨는 “조금씩 끝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여기저기에 검은 (원유) 반점이 박혀 있다”며 걱정스러워했다. 밀려오는 파도 끝자락에도 원유 찌꺼기가 묻어있었다. 김씨는 삽으로 백사장을 파 보이며 남아 있는 기름 덩어리를 보여줬다. 끈적했다.

퍼내는 작업은 끝났지만, 닦아내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자원봉사자들은 김 매는 농부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기름을 닦아냈다.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가 오늘도 만리포를 찾았다. 주민 조호원(44)씨는 “팬티만 입고 바다에 뛰어들 수 있어야, 정말 끝난 것”이라고 말했다.

만리포에서 차로 5분 거리에 있는 모항에는 더 많은 자원봉사자가 몰려 있었다. 1000여 명이 넘었다. 그만큼 방제가 늦어진 곳이기도 하다. 방파제와 기암괴석, 자갈 해변은 여전히 검은색이었다. 갯내음도 되찾지 못했다.

봉사자들은 자갈 해변을 파내 잦아든 기름을 퍼내고, 바위에 달라붙어 기름을 닦아냈다. 온몸으로, 맨손으로 ‘인해전술’을 폈다. 어민들은 볏짚을 모아 묶고 있었다. 오후 2시부터는 밀물이고, 그때에 맞춰 볏단을 해변에 띄워야 한다. 볏단은 기름을 흡수하거나 모으는 역할을 한다. 오봉환(69·모항1리)씨는 “처음에는 기름 퍼내느라 힘들어 아침에 일어날 수도 없었는데, 저분들(자원봉사자)이 돈 한푼 안 받고 와줘서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갯벌에서 굴을 캐서 먹고사는 모항3구 망산마을의 풍경도 비슷했다. 자원봉사자들의 방제작업이 꾸준히 이뤄지고 있었다. 작은 마을이지만 토요일인 5일에 1000여 명, 이날도 800여 명이 찾았다.

친구·직장·학교뿐만 아니라 혼자 온 이들도 많았다. 가족 단위 봉사자들도 눈에 많이 띄었다. 서울 양재동에서 새벽에 내려왔다는 엄기정(45)씨는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지금에야 왔다. 빚을 진 것 같았다”고 말했다. 부인 이재옥(38)씨, 딸 사랑(11)·아들 지용(8)과 함께 온 엄씨는 “환경보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주고 싶었다”며 “큰 재앙이지만 희망도 발견했다”고 강조했다.

망산마을 이동명(44)씨는 “춥던 날씨가 풀린 3일, 갯벌 속에 뭉쳐 있던 기름이 표면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며 “얼마나 더 숨어 있는지 알 길이 없다. 한 번 (환경이) 망가지면 얼마나 힘든지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했다.

‘파괴와 재생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태안은 그 자체로 ‘환경교과서’가 되고 있었다. 모항 어민 정낙칠(71)씨는 “요즘 때면 세모(참가사리)가 한창이다. 말려서 국에 넣어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지 모른다”고 말했다. “죽기 전에 다시 못 먹겠지”라고 혼잣말을 했다. 봄이 오면, 이곳에 톳이 많이 난다. 정씨는 “물에 살짝 데친 톳을 무치면, 그게 봄 잔칫상”이라며 입맛을 다셨다.

한 달 동안 57만 명이 넘는 자원봉사자가 찾았다. 태안군은 ‘100만 자원봉사자’도 가능할 것으로 보고 있다. 태안은 아직 복구되지 않았다. 그러나 수십만 자원봉사자의 온기로 ‘먹음 직한 톳이 다시 날 것’이라는 희망은 꺼지지 않았다.

태안=강인식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