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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경철의 문학으로 본 역사 <1> 알퐁스 도데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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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호 32면

일러스트=남궁유

알퐁스 도데(1840∼1897)가 태어난 남부 프랑스의 프로방스 지방은 언제나 아름답고 정겨운 곳이다. 남쪽에는 지중해의 쪽빛 바다가 넘실대고 동쪽과 북쪽으로는 제법 높은 알프스 산줄기가 지나며 서쪽으로는 론 강 유역의 풍요로운 평야가 펼쳐져 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이 아름다운 풍광 속에서 소박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 또는 버림받고 쓸쓸한 사람들을 애정을 가지고 따뜻하게 그려냈다.

‘별’의 작가 애국심에 불 댕긴 보불전쟁

우리나라 교과서에도 실려서 더욱 친숙한 단편 ‘별’은 그의 아름다운 서정이 잘 나타나는 작품이다.

산속에서 홀로 거칠고 투박한 삶을 살아가는 목동에게 어느 날 꿈같은 일이 일어난다. 보름마다 산 아래 마을에서 노새에 음식을 싣고 올라오던 머슴아이가 몸살이 나는 바람에 이날은 스테파네트 아가씨가 직접 올라온 것이다. “오후 세 시쯤 하늘이 개고 빗방울이 햇빛을 머금어 온 산이 반짝거리고 있을 때”, 이 고장에서 제일 예쁘기로 소문났고, 사실 이 목동 총각도 마음속으로만 연모하던 바로 그 주인집 아가씨가 딸랑거리는 노새 방울 소리와 함께 나타났다.

그런데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소나기가 내리는 바람에 소르그 강의 물이 불어서 아가씨는 할 수 없이 되돌아왔다. 그리하여 목동 총각은 날이면 날마다 마음속으로만 사랑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던 바로 그 아가씨와 단둘이서 산막에서 밤을 지내게 된 것이다. 양들이 뒤척이는 바람에 짚이 사그락거리고, 양들이 잠꼬대를 하면서 울어대는 통에 잠을 이루지 못한 아가씨는 다시 집 밖으로 나온다. 순진한 총각은 아가씨 어깨에 양털을 덮어주고 모닥불을 피운 채 별 이야기를 해주면서 밤을 지새운다.

한참 별 이야기를 해주던 목동의 어깨에 상큼하면서도 부드러운 뭔가가 살포시 내려앉는다.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무거워진 아가씨의 머리! 곱슬곱슬한 머리에 매단 리본과 레이스가 앙증맞게 사그락거린다.

“아가씨는 그렇게 꼼짝도 하지 않고 밤하늘의 별빛이 엷어지고 마침내 사라질 때까지 그대로 있었답니다. 나는 아가씨의 잠든 모습을 자꾸만 들여다보았습니다. 가슴이 울렁거리기는 했지만, 맑은 밤하늘 덕택에 아름다운 마음만 간직할 수 있었지요. 우리 주위로는 별들이 마치 순한 양떼처럼 천천히 발걸음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깨에 살포시 내려앉아 잠들어 있다고….”

순진한 목동 총각의 그 지순한 사랑을 어쩌면 이처럼 예쁘게 그릴 수 있을까….
그러나 세상은 언제까지나 그런 아름답고 순진한 상태에 머물러 있지는 않다. 역사의 격랑이 세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특히 1870년 보불전쟁은 프랑스인의 가슴에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일찍이 나폴레옹 군대의 지배를 받았던 독일에서는 19세기 내내 급격한 정치적 변화와 산업화가 진행되었다.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소위 ‘철과 피’(즉 산업화와 군국주의)의 정책을 통해 국력을 크게 키운 다음 프랑스를 눌러 이기고, 지금까지 수많은 나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의 통일을 이루고자 했다.

그러나 프랑스는 여전히 나폴레옹의 옛 영광의 꿈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1848년 대선에서는 루이 나폴레옹이라는 정체불명의 인사가 대통령으로 뽑혔다. 그가 당선된 것은 거의 전적으로 나폴레옹이라는 이름 덕이었다. “역사는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첫 번째가 비극이라면 두 번째는 코미디이다.” 역사에 대한 혜안을 자랑하는 마르크스의 분석처럼 나폴레옹 3세(그는 나폴레옹 황제의 조카였기 때문에 2세가 아니고 3세가 되었다)의 행적에는 희극적인 요소가 있다.

그는 대통령 임기가 끝나갈 무렵 스스로 친위 쿠데타를 감행하고 자신을 황제로 만들었다. 프로이센이 공격해 오자 프랑스의 포병대가 쉽게 격퇴시키리라고 믿었으나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결과는 정반대였다. 프로이센 군대는 거칠 것 없이 프랑스로 밀려왔고, 황제께서 직접 군대를 격려한다고 나섰다가 오히려 포로로 잡힌 후 영국으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다.

프로이센군이 파리를 포위한 가운데 베르사유 궁정에서 통일된 독일 제국이 선포되었다. 왜 하필 남의 나라 궁정을 빌려서 제국을 선포해야 했는지 모르겠지만, 이것이 프랑스 국민에게 씻기 힘든 상처를 안겨준 것은 분명하다.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인들은 성모 마리아의 힘으로 독일을 막겠다고 몽마르트르 언덕에 성심성당(聖心聖堂, Sacr Coeur)을 지었고, 파리 시내에는 동쪽을 향해 노려보는 청동 사자상을 세우는가 하면, 독일이 부과한 엄청난 액수의 전쟁 배상금을 전 국민의 모금운동을 통해 일찍 갚아버렸다.

따뜻한 마음씨의 시골 출신 시인 역시 이런 흐름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도데는 독일과의 전쟁에서 프랑스인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을 저질렀는지(독일군이 쳐들어오는데 당구에 정신이 빠져 있는 장교, 감자 몇 알을 얻기 위해 프랑스군의 정보를 독일군에게 넘겨주는 파리의 어린이들), 또 그들이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파리의 페르라셰즈 묘지에서 마지막까지 저항하다가 총살당한 민병대, 프랑스어 대신 독일어를 배워야 하는 알자스인들) 증언하는 작품들을 썼다.

파리가 점령당하는 상황을 비극적으로, 그러나 동시에 재치 있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베를린 공방전’이라는 짧은 작품이 있다.

주브 대령은 나폴레옹 1세의 군대에서 기병 장교를 지낸 인물이다. 이 80세 노인은 프랑스 군대가 승리를 거두고 돌아오는 개선식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샹젤리제의 아파트로 이사 와서 손녀와 둘이 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프랑스군이 프로이센군에게 대패한 뷔센부르크 전투 소식을 듣고 졸도해 버렸다.

의사가 찾아갔을 때 그는 반신불수가 될 위험이 있었다. 할 수 없이 의사와 손녀는 가짜 전투 소식을 만들어서 노인에게 이야기를 해주기로 했다. 소녀는 열심히 독일 지도를 보면서 프랑스 군대가 독일 지역을 점령해 가는 작전을 짜야 했고, 그 이야기를 듣는 노인은 어린애처럼 기뻐하며 속아 넘어갔다. 어느 군단은 베를린으로 진격해 들어가고, 어느 군단은 바바리아로, 또 다른 어느 군단은 발트해를 따라 북부 지역을 초토화하는 중이다….

나폴레옹 시대에 실제로 독일 지역에서 전투를 했던 할아버지는 독일의 지리를 훤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 번 전투를 잘 예측할 수 있었다.

“이제 프랑스군은 이리로 갈 거야. 그 다음에는 이렇게 할 거고….”

그러면 다음 날 그의 탁월한 예견은 실제로 실현되었다. 소녀는 할아버지가 예견한 대로 프랑스군이 승리한 소식을 전해 주었다.

“1주일 후면 베를린을 점령할 수 있을 거다!” 할아버지는 기쁨에 겨워 소리를 쳤지만, 실제로는 파리가 점령되는 데에 1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그러는 동안 포위된 파리에서는 음식이 다 떨어져 갔다. 손녀는 모든 음식을 할아버지
에게 드리느라고 거의 굶고 있었으나, 턱에 예쁘게 냅킨을 한 할아버지는 옛날을 회고하면서 러시아 전선에서는 말고기밖에는 먹을 것이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지만 이때 손녀 역시 말고기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연극도 드디어 끝났다. 프로이센군이 슈베르트의 행진곡에 맞춰 파리 시내로 입성하는 날, 프랑스군의 개선식을 보려는 할아버지는 옛날 군복을 차려입고 옆에 군도까지 차고는 샹젤리제 거리로 난 창문을 활짝 열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프로이센군이다! 총을 들어라!” 하는 외침과 함께 노인은 발코니에서 거리로 떨어져서 죽었다.

모든 프랑스인의 마음에는 복수의 열망이 자리 잡았다. 이제 라인 강의 서쪽과 동쪽에서 모두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예고하는 호전적 민족주의가 자라났다.

프로방스의 정경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씨를 가진 시인 역시 열렬한 민족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제1차 세계대전 때에 조국을 위해 ‘동원’되었다가 어느 낯선 땅 참호에서 독가스 공격을 당해 죽어가던 병사 중에는 머리를 어깨에 살포시 기댄 스테파네트 아가씨 곁에서 프로방스의 여름밤 별을 지켜보던 순진한 목동 같은 사람도 끼어 있었을 것이다.

주경철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역사에 관심이 많아 서울대 서양사학과 대학원으로 진학했다.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현재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역사의 기억, 역사의 상상』『문화로 읽는 세계사』등 역사와 문화를 함께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많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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