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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일 달러’ 빠지면 월가도 흔들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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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유가가 2일(현지시간)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했다. 중동 산유국을 중심으로 한 오일머니 파워가 올해도 위력을 떨칠 조짐이다.

지난해 고공행진을 계속한 유가 덕분에 산유국들은 전 세계 자금을 진공청소기처럼 빨아들였다. 이 막대한 오일머니는 금융계에선 투자자로, 산업계에선 구매자로 ‘글로벌 큰손’이 된 지 오래다.

새해 첫 거래일부터 사상 최고를 기록하며 배럴당 100달러를 돌파한 올해는 오일머니의 위력이 본격적으로 전 세계 경제계를 강타하는 원년이 될 것으로 전망된다.

◆‘유대인 아성’ 월가까지 공세적 진출=오일머니는 이미 국제 금융시장에서 ‘급전’으로 주목받고 있다. 세계 최대의 국부펀드를 운용하는 아랍에미리트의 아부다비투자청(ADIA)은 지난해 씨티그룹에 75억 달러를 투자했다. 씨티그룹은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 사태로 자금 부족 사태를 겪어 왔다. 이런 와중에 이슬람권 뭉칫돈이 월가에 구세주로 등장한 것이다. ADIA는 대형 사모펀드인 아폴로 매니지펀드의 지분 9.9%를 매입하는 등 공격적인 금융 투자를 하고 있다.

세계 30개국이 보유 외환 등을 바탕으로 운용하는 국부펀드는 단연 오일머니가 주를 이루고 있다. 아랍에미리트의 ADIA(8750억 달러)와 노르웨이(3300억 달러)·싱가포르(3300억 달러)·사우디아라비아(3000억 달러)·쿠웨이트(2500억 달러)·중국(2000억 달러) 등 2000억 달러가 넘는 세계 6대 국부펀드 가운데 싱가포르와 중국을 제외한 세 개가 오일머니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친서방 선회한 리비아도 투자 가세=오랫동안 반서방의 길을 걷다 최근 최고지도자 무아마르 카다피의 노선 전환으로 개방정책을 펴고 있는 리비아도 주목 대상이다. 그동안 모아 온 거대한 오일달러를 서방에 투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바그다디 마무디 리비아 총리는 지난해 12월 1000억 달러 이상의 펀드를 조성해 해외에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마무디 총리는 “리비아 바깥의 다양한 분야에 1000억 달러 이상을 투자할 채비를 갖추고 있다”며 “외국 주식과 채권 및 기타 자산을 확보하는 방안을 모색 중”이라고 말했다. 워싱턴 포스트에 따르면 이 가운데 400억 달러는 월가에 집중 투자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뿐만 아니다. 자국 내 주택과 에너지 및 통신 등 인프라 쪽에는 1550억 달러를 투자할 방침이다. 이미 12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을 만나 에어버스 항공기와 담수화 설비를 비롯, 모두 100억 유로(약 147억 달러)어치를 구입하기로 했다. 카다피는 프랑스 원전 도입도 추진하고 있다. 오일달러로 나라를 바꿔 놓겠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사르코지는 카다피에게 인권을 비롯한 예민한 문제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민주와 인권을 주장하던 예전의 프랑스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오일머니의 위력이 ‘말 많던’ 프랑스 대통령의 입까지 막은 것이다.

◆올 한 해 투자가 15년치보다 많아=금융은 물론 산업 분야에도 오일머니 투자가 부쩍 활기를 띠고 있다. 중동 오일머니의 미 산업계 투자는 2006년 32건, 45억 달러 수준이었으나 지난해엔 42건에 투자액도 250억 달러로 크게 늘었다. 한 해 투자 실적이 1991∼2005년 15년 동안의 248억 달러를 넘어선 것이다.

쿠웨이트 투자국은 이미 크라이슬러 자동차의 지분 7.2%를 확보, 최대주주가 됐다.

중동 오일머니는 미국 실리콘밸리의 핵심 기업 지분도 인수하고 있다. 아부다비 국영 펀드인 무바달라 디벨로프먼트 컴퍼니는 세계 2위 반도체 메이커인 AMD에 6억2200만 달러를 투자해 3위 주주가 됐다. 이 회사는 지난해 16억 달러 이상의 적자를 내면서 주가가 35% 이상 떨어져 시가총액이 40억 달러나 빠졌다.

AMD는 부채가 53억 달러이나 현금 유동성은 15억 달러에 불과해 자금 차입이 필요한 상황에서 아부다비의 투자를 받아들인 것이다. 국방부 컴퓨터에도 이 회사의 제품이 사용되고 있을 정도다.

◆서구에선 국가 안보 불안감도=로버트 키밋 미 재무부 차관은 최근 외교전문지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에서 “외국 국부펀드의 유입에서 가장 확실히 해야 할 고려 요소는 국가 안보 문제”라며 자세히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일머니가 행사하려는 업체에 대한 영향력의 범위와 정보 누설 등이 국가 안보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메릴린치의 국제경제 책임자인 알렉스 퍼텔리스는 월스트리트 저널에 “오일머니를 비롯한 제3세계의 뭉칫돈이 지구촌 곳곳에서 위력을 보이고 있는 것은 개도국들이 경제 수퍼파워로 떠오르고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진단했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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