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거기 그녀가 서있는걸 보았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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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5면

내 말에 하영이가 재미있어 죽겠다는듯이 웃었다.하지만 키득대거나 소리를 내면서 웃는 건 아니었고,하영이답게 표정을 잔뜩 절제하면서 미소를 지었다는 이야기다.어쨌든 하영이의 웃음은 너무나 맑았고 오히려 그것이 나를 쓰리게 만들었다.
써니와 하영이는 달랐던 거였다.
『그래,몇 시간 안남았는데 가서 마무리를 해야지.시험 보기 직전에 하는 공부가 가장 영양가 있는 거래잖아.』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섰고 우리는 악수도 하지 않고 헤어졌다.나는 포장마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악동들과 어울려서 시험을 앞둔 수험생치고는꽤 취했었다.그때문에 다음날 시험을 망친 건 아니었고,어차피 실력만큼의 성적밖에 나오지 않은 거 였다.
하영이와는 그뒤로도 학교에서 간혹 마주쳤고,내가 전기대학에 떨어졌을 때 하영이가 집으로 따로 위로전화를 해주기도 했지만 그저 그것 뿐이었다.우리는 서로에게,대학에 들어와서 맥없이 멀어진 고교시절 친구들 중의 하나로 전락해버리고 말 았는데,거기에는 하영이가 우리 고교에서 유일하게 일류 의과대학에 입학했다는 사실도 은근히 한몫 작용했는지 모른다.
나는 하영이에게 미쳐서 보낸 고교 초년생 시절을 그리워하고는했지만 그건 내가 보낸 한시절을 그리워한 것일 뿐 하영이를 그리워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리움이었다.
대학에 들어온 이후의 나는 소라나 희수와 많은 시간을 보냈다.관계의 깊이라는 것이 반드시 같이 보낸 시간의 길이에 비례하는 건 아닐지라도,함께 한시절을 보냈다는 건 여전히 엄청난 일이었다.어떤 책에서 이런 구절을 본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 말이 옳다고 생각했다.
「네가 그걸 위해서 쓴 시간 때문에 그게 너에게 중요하게 된거야.」 오죽하면 애오라지 함께 같은 시간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얼굴 한번 못본 동시대인들에게까지 애정을 느낀다는 사람들이 있을까 하고 나는 생각해보기도 했다.
소라와 나는 같은 과 친구들이 캠퍼스 커플로 인정할 만큼 가깝게 지낸 게 사실이긴 했지만,그리고 소라와 나 어느 쪽도 그런 시선에 변명할 마음도 없었지만,우리는 그저 좋은 친구에 불과했다.내가 용호도에 갔을 때,소라가 널려있는 해 변을 소라와나란히 맨발로 거니는데 소라가 그랬었다.
『난…달수 널 알게 된 게 아주 기뻐.누가 뭐라고 하든…우리같은 관계가 가능하다는 게 너무나 기뻐.놀라운 일이잖아,안그래.난 니 아이를 낳는 일 빼놓구는…널 위해서 뭐든지 할 수 있을 거라구.』 『왜…그건 빼놓구 싶은 거지?』 내가 웃으면서 그랬었다.
『모르겠어.그런 게 개입하면…우리 사이가 어쩐지…그러니까 복잡해질까봐 겁나는 거겠지 뭐.내가 지금만큼 널 좋아하는 게 망가질까봐 그러는 거겠지 뭐.』 나는 사실 소라가 말하는 뜻을 이해했다.욕정에 휘말리지 않고,평온하고 잔잔하게 누구를 깊이 좋아한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였다 소라가 내게 척하니팔짱을 끼더니 또 말했다.
『난 어려서부터 수녀가 되고 싶었거든.수녀가 돼도…너같은 친구가 옆에 있을 거라는 자신이 생기면 난 수녀가 될 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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