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있는아침] 서시(序詩)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5면

‘서시(序詩)’-라이너 마리아 릴케(1875~1926)

네가 누구라도, 저녁이 되면

네눈에 익은 것들로 들어찬 방에서 나와 보라.

먼 곳을 배경으로 너의 집은 마지막 집인 듯 고즈넉하다,

네가 누구라도.

지칠 대로 지쳐, 닳고 닳은 문지방에서

벗어날 줄 모르는 너의 두 눈으로

아주 천천히 너는 한 그루 검은 나무를 일으켜

하늘에다 세운다, 쭉 뻗은 고독한 모습. 그리하여

너는 세계 하나를 만들었으니, 그 세계는 크고,

침묵 속에서 익어가는 한 마디 말과 같다.

그리고 네 의지가 그 세계의 뜻을 파악하면,

너의 두눈은 그 세계를 살며시 풀어준다…


시인은 단호히 저녁은 세계 하나를 만들 시간이라고 말한다. 시인은 당신이 누구라도 저녁이 되면 익숙한 것들로 꽉찬 방에서 나와 당신의 집을 먼 곳의 마지막 집처럼 바라보라고 권유한다. 산책길에서 만나는 나무에 대한 바라보기를 통해 자신의 내면에다가 한 그루 ‘나무’를 심으라고 속삭인다. 소유하지 않는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우리가 서로를 이기적인 사랑의 대상이 아니라 방향으로 삼을 때 그 세계는 크게 울린다. <박형준ㆍ시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