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비서실>209.全씨 5共청문회 증언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8면

정호용(鄭鎬溶)의원이 청와대의 의원직사퇴요구를 사실상 받아들인 직후인 89년 12월14일.전두환(全斗煥)전대통령의 국회증언을 책임지고 있는 이한동(李漢東)원내총무는 6共 청와대대표인홍성철(洪性澈)비서실장과 함께 백담사 대표인 이 양우(李亮雨)前사정수석을 만났다.
다음날인 15일에는 대통령이 야당총재인 3金씨를 불러 청와대에서 全전대통령의 국회증언에 합의할 예정이었기에 14일은 백담사의 국회증언수락을 받아내야하는 데드라인.
그러나 당사자인 全전대통령이 완강히 버티고 있는데 대리인간의협상이 진전될리 없었고 벼랑끝에 선 6共대표들은 당사자인 全전대통령에게 직접 얘기하기 위해 백담사로 찾아갔으나 역시 호통만받고 물러나와야 했다.
다음날 대통령은 예정대로 3金씨를 청와대로 불러 全전대통령의국회증언에 합의해버렸다.이미 예정돼 있던 정호용의원의 사퇴약속과 함께.
그러니 백담사와의 관계는 더 꼬였다.노태우(盧泰愚)대통령이 직접 백담사로 전화를 걸었으나 全전대통령은 통화를 거부했다.全전대통령은 측근을 통해 『더이상 못믿겠다』며 『전화로 말하는 것도 못믿겠고,편지로 써보내는 것도 못믿겠으니 직 접 찾아와 얘기하라』는 요구를 전해왔다.이같은 불경(不敬)스런 전언을 받은 최창윤(崔昌潤)정무수석은 또다른 백담사창구인 정구영(鄭銶永)민정수석과 짐을 나눠지기위해 같이 대통령집무실로 들어갔다.어려운 말도 적절히 기분나쁘지 않게 말하 길 잘하는 鄭수석이 장황하게 전후사정을 설명한뒤 백담사측의 요구를 보고했다.盧대통령이 탁자를 치며 『무슨 일들을 그렇게 하느냐』며 화를 내는 것은 당연했다.그렇다고 문제가 풀리는 것은 아니었고 시간은 없었다.결국 盧대통령이 직접 찾 아가기로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백담사인근 군부대에서 점심식사를 같이하는 극비회동을 계획하고 백담사에 통보했다.그렇지만 실제 회동은 이뤄지지 않았다.6共관계자들은 회동이 이뤄지지않은 이유로 『날씨가 나빠 헬기가 뜰수 없었다』고 주장하 지만 5共관계자들은 盧대통령의 의지를 의심하고 있다.
회동은 불발됐지만 全전대통령은 『현직 대통령이 직접 오려고 생각했다』는 사실에 심경의 변화를 보인 듯하다.6共 관계자 R씨는 『盧대통령이 직접 찾아가겠다는 연락을 받은 얼마뒤 백담사측에서 「현직 대통령이 직접 오게해서야 되겠느냐」 는 뜻과 함께 증언의사를 표명해왔다』고 기억했다.
희소식을 접한 盧대통령은 12월23일 다시 全전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었다.盧대통령은 다시한번 全전대통령에게 그간의 경과에 대해 사과하고 국회증언을 간청했으며,이후 구속된 친인척의 석방등 5共문제 종결을 약속해야했다.
5共 관계자들이 『각하(全전대통령)께서 그렇게 화내는 것을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기억할 정도로 全전대통령은 이날 통화에서 盧대통령을 호되게 몰아세웠다고 한다.한 관계자에 따르면 全전대통령은 盧대통령에게 『훗날 내 자식들에게 「노 태우는 날 배반하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도록 해달라』는 비장한 최후진술을한뒤 증언을 받아들였다고 한다.그리고 그는 믿음직스럽지못한 盧대통령의 약속에 대한 물증으로 삼기위해 이날 통화내용을 녹음까지 해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실무차원의 협상도 이무렵부터 급진전돼갔다.당시 국회를 책임지고 있던 이한동총무는 23일 밤 국회원내총무실에서 혼자 깊은 생각에 잠겨있었다.국회법상 증언을 위해서는 1주일전에 증인에게출석을 요구하는 통지를 보내야한다.당초 국회증언 날을 30일로생각하고 있었기에 이날은 통보마감시한이었으나 백담사의 증언수용은 아직 타결되지않은 시점이었던 것이다.
李총무는 『일단 일을 저지르고보자』고 결심하고는 밤늦게 산더미같이 쌓여있던 질의서와 함께 소환장을 백담사 창구인 이양우씨의 사무실로 보냈다.얼마뒤 李씨로부터 전화가 왔다.李총무는 『처음에는 펄펄 뛰더군요.그러나 「일단 법적 절차는 밟고봐야하는것 아니냐」고 설득하자 좀 누그러들더군요.그리고는 「소환장은 증인에게 직접 전달해야하는데 지금 백담사로 가더라도 도착하면 24일 새벽이다.그러니 증언날짜도 31일로 하루 늦춰야한다」고요구하더군요.그래서 증언날짜가 3 0일에서 31일로 바뀌었죠』라고 기억했다.
그날밤 李씨는 밤을 새워 백담사로 달려갔고,새벽시간 백담사에서는 참모회의가 열렸다.이미 全.盧간의 직접 통화가 성사되고 全전대통령은 증언을 결심한 시점이었다.국회증언이라는 백담사의 공식입장이 확정됐다.
성탄전야인 그날부터 백담사측은 밤을 지새며 답변을 준비했다.
며칠만에 방대한 내용에 걸친 답변을 준비할수 있었던 것은 청와대측에서 여러가지 모범답안을 만들어주었고,백담사측은 주로 이를취사선택하는 방식으로 준비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이무렵 全전대통령의 증언을 실무차원에서 추진하는데 한몫한 인물은 이한동총무가 당시 자신의 장자방(張子房)이라 불렀던 장경우(張慶宇)의원(장자방은 중국 漢나라를 건국한 高祖 劉邦의 참모였던 張良의 字.흔히 정치적 책략이 뛰어난 사람 을 일컫는 말로 수양대군은 팔삭동이 韓明澮를 자신의 장자방이라고 불렀었다).그는 부총무인 동시에 5共특위간사였다.
張의원이 기억하는 실무차원의 문제와 협상과제는 역시 전직대통령들이 몹시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의전적인 문제였다.張의원의 협상창구도 이양우씨였다.李씨는 몇가지 조건을 제시했다.주요한 조건은 ▲증인선서는 안한다 ▲일문일답 형식은 안된 다(일괄답변형식으로 진행해야 한다)▲증언이 하루를 지나면 안된다(당일로 끝내야한다)는 것등이었다.이미 막후 정계개편협상이 거의 끝나가던 우호적인 분위기였기에 이정도의 조건으로 야당과 거래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마지막에 문제가 꼬였다.갑자기 증언 하루전 평민당에서「증인선서만은 해야된다」고 태도를 바꾼 것이다.이미「선서 안해도 된다」고 백담사에 통보까지 해둔 상태였다.급한 나머지 그날밤 李총무와 장경우간사가 평민당 김원기(金元基)원 내총무집으로찾아가 사정을 했다.『제발 선서만은 안하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문제는 풀리지 않았다.
증언 당일 아침 全전대통령이 차를 타고 백담사에서 서울로 향하던 바로 그시간까지 민정당 총무단은 평민당측에「선서만은 제발안하게 해달라」고 간청하고 있었다.「혹시나 선서를 안하게 할수있을까」해 서울로 오고있는 全전대통령 호위차량 으로 무선전화해「차를 천천히 몰고오라」고 호들갑을 떨기도 했지만 야당은 끝내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새벽 5시에 백담사를 떠난 全전대통령이 오전 9시28분 국회에 도착했다.은덕을 입었던 의원들이 대거 마중나가 귀빈실(총리대기실)로 모셨다.이제 남은 문제는 누가「증인선서를 해야한다」는 약속위반을 통보하느냐는 것이었다.李총무가『실무 당사자인 당신이 하라』며 張간사에게 악역을 맡겼다.
張간사가 광주특위 간사인 이민섭(李敏燮)의원과 함께 귀빈실로찾아갔다.全전대통령 옆으로 늘어선 5共의 수혜자들은 무거운 침묵에 갇혀있었다.張간사가 입을 열었다.
***“증언선서 하셔야” 『증인선서를 안할수 없게 됐습니다.
』 全전대통령이 의아한 표정으로 쳐다봤다.그리고『그거 안하기로했었던 것 아니오』라고 짤막하게 내뱉었다.
『그런데 야당에서 갑자기 입장을 바꿔서…도저히….』張간사가 그간의 경과를 설명했다.
묵묵히 듣고있던 全전대통령이 할수없다는듯 의미심장한 한마디를던졌다. 『전투에서 이기고도 전쟁에서 지는 일은 없도록 해주시오.』 오전10시8분부터 증언이 시작됐다.물론 全전대통령은 미리 준비해온 답변을 일사천리로 읽어나갔으며,중요한 문제는 대개부인하거나 우회해갔다.당연히 비난여론이 비등하기 시작했다.특히광주문제와 관련돼 평민당에 전화가 빗발쳤다.
당시 평민당 관계자 X씨의 기억에 따르면 전화내용은『저런 뻔뻔스런 거짓말을 그냥 듣고 있느냐』는 울분토로에서 점점 흥분의도를 더해가더니 마침내는『그런식으로 하면 가만 안있겠다.앞으로평민당 찍어주나 봐라』를 거쳐『평민당사를 폭파 해버리겠다』는 협박까지 거침없이 나왔다고 한다.X씨는『워낙 분위기가 험악해 당지도부에서도「그냥 순조롭게 끝내서는 안되겠다」는 판단이 있었습니다』고 기억했다.
꼭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증언도중 직접관계자인 시민군간부출신 평민당 정상용(鄭祥容)의원이 증언대를 향해 돌진했고,몸싸움을 벌이는 사이 같은 평민당소속 이철용(李喆鎔)의원이 단상으로 뛰어올라가 全전대통령을 향해『이 살인마』 라고 외쳤다.
全전대통령은 흘끗 쳐다본뒤 다시 준비된 답변을 읽어내려갔다.민정당의원들이 손가락질하고 서있던 李의원을 끌어내렸다.다시 명패가 날아가 증언대 바로 앞에 떨어졌다.정회가 선포됐다.
***平民에 전화빗발 全전대통령은 이같은 해프닝에 유감을 표시했지만 결과적으로「전투에서 이기고 전쟁에서 진」것은 평민당쪽이었다.이번에는 민정당에 전화가 빗발쳤다.『저래가지고 무슨…』이라는 소동 주역 의원들에 대한 자질론 시비와 함께『이제 됐으니 그만하 라』는 全전대통령 동정론이었다.이미 증언은 하루를 넘기지 않기로 사전약속이 돼있었는데 회의는 속개되지않았고,시간은 자정을 향해 달렸다.
全전대통령이『이왕 증언하는 김에 역사의 기록은 남기겠다』며 남은 시간동안 읽을수 있는 분량의 내용을 추리라고 지시했다.그리고 기자들을 불러 추려진 원고를 빠르게 읽어내려갔다.정확히 12시 1분전 낭독을 끝낸 全전대통령이 벌떡 일어 나 나가버렸다.야당보좌관등이 몸으로 막으려했지만 全전대통령은 경위와 경호원들의 보호를 받으며 차에 올라 어둠을 달려 백담사로 돌아갔다. 全전대통령은 연희동집으로 귀가하길 원했지만 6共 청와대에서는「아직 분위기가 좋지않다」며 이를 거부했기에 다시 겨울 산사로 숨어들어야했던 것이다.야당에서는『무효다』『다시하자』는 주장이 터져나왔지만 이미 5共청산문제는 그날,그해로 끝 나게 합의돼 있었다.
90년「3당 통합」의 해가 밝아왔다.盧대통령은 새해 벽두 백담사로 감사와 위로의 전화를 한다.
〈吳炳祥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