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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훈범시시각각

바보들의 목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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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정사를 펼 때 눈앞의 이익을 떠나 거시적으로 넓고 깊게 따져봐야 한다는 얘기다. 태종은 이 말을 가슴 깊이 새겼다. 중국 최고의 황금시대라는 ‘정관의 치세(貞觀之治)’가 가능했던 이유다. 이는 1400년이 지난 오늘, 중국 땅이 아닌 한반도에서 더욱 곱씹어야 할 교훈이 아닌가 싶다.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근시안적 정책들이 우리 사회를 얼마나 멍들게 했는가 말이다.
 
우선 인구정책이 그렇다. 1970년대 “아들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구호는 역사상 최대 히트작이라 할 만하다. 지금도 그 메아리가 귀에 맴돌 정도다. 83년 인구가 4000만 명을 돌파하자 구호는 한층 거세진다. “하나만 낳아도 초만원” “핵폭발보다 무서운 인구폭발” 같은 협박(?)과 함께 도시마다 인구시계탑이 세워지고 공공건물 화장실에 콘돔 자판기가 설치됐다. 예비군 훈련 면제라는 달콤한 유혹까지 겹쳐 많은 남성이 씨 없는 수박이 됐다.

하지만 불과 20여 년 지난 오늘, 어떤가. 2005년 합계출산율 1.08명이라는 세계 최저기록을 세운 뒤 이제는 반대 이유로 비명을 지른다. 인구가 적어서가 아니다. 기형적인 인구구조가 가져올 악몽이 두려운 거다. 국내 거주 인구는 지난해 5000만 명을 돌파했다. 그런데 73년 1500만 명(총인구 3100만 명)이던 미성년층이 이제는 1300만 명밖에 안 된다. ‘세계 최고’의 속도로 고령화 사회에 진입한 것이다. 2050년에는 노인 인구 비율이 세계 최고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이제 와서 애를 낳으면 돈을 준다 어쩐다 난리지만 이미 바뀐 가치관을 돌이키기가 쉬워 보이지 않는다. 20~30년 뒤도 생각하지 못하는 졸보기 정책이 우리 미래를 어둡게 만든 것이다. “기하급수적 인구 증가”를 예언한 맬서스 탓으로 돌릴 수도 있겠지만 200년 전 그의 이론이 70년대 초반에 이미 일부 저개발국가에만 유효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쓸 만한 변명은 아닐 성싶다.  
 
이에 비하면 70년대 분식 장려 정책은 귀여운 수준이다. “밀가루 음식이 건강에 좋다” “쌀만 먹으면 머리가 나빠진다”는 선전에 열 올리던 ‘대한 늬우스’는 94년 “쌀국수를 애용하자”는 반대 구호를 외치며 수명을 마쳤다. 아무리 쌀이 부족하던 시대라지만 쌀로 술 빚는 걸 금지해 부가가치가 훨씬 높은 우리 전통주들의 맥을 끊은 건 섣부른 정책의 대표적 피해 사례다.

“지난 다음엔 무슨 소릴 못하겠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겠다. 결과를 알고 나서 이미 예상하고 있던 것처럼 믿는 ‘사후인지의 편견(Hindsight bias)’이란 비난은 달게 받겠다. 하지만 새해, 새 정부를 맞는 지금 더 이상 “앗 차가워, 앗 뜨거워”를 반복하는 ‘바보 목욕’ 정책이 다시 없기를 바라기에 하는 얘기다. 증오와 편견이라는 잘못된 출발점에서 시작해 경주 내내 절뚝거릴 수밖에 없었던 부동산·교육 정책이지만 뒤집는다고 능사가 아니다. “현 정부 정책을 무조건 나쁘게 보지 말라”는 당선자의 말은 오히려 다행스럽다. 증오와 편견은 오만과 졸속을 낳기 마련이다. 보다 많은 고민이 필요한 이유다. 한반도 대운하라는 대역사는 특히 그렇다. 새만금의 전철을 다시 밟기엔 되돌아갈 걸음이 너무 멀지 않은가 말이다.

이훈범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