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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분수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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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일본 전통예능인 라쿠고(落語·1인 만담 극) 중 한 해를 장식하는 대표작은 ‘시바하마(芝濱)’다. 부부간의 신의와 애정을 따뜻하게 묘사한 이 작품이 한 해의 마지막 날인 31일에 맞춰 상영되는 데는 이유가 있다. 절정의 장면이 12월 31일이기 때문이다.

허름한 생선가게에서 일하는 주인공 마사루는 매일 술만 마시며 허송세월한다. 일확천금의 꿈만 꾸며 장사는 하는 둥 마는 둥 한다. 어느 날 새벽 그는 술이 덜 깬 채 부인의 재촉에 마지못해 도쿄 시바에 있는 어시장으로 향한다. 어시장 옆 바닷가를 거닐던 그는 거액이 들어 있는 지갑을 줍는다. 신바람이 난 그는 친구들과 아침부터 또 술을 마신다. 그런데 계산을 하려고 보니 지갑이 없었다. 황당해 하는 그에게 부인은 “지갑을 주었다는 것 자체가 꿈”이라며 나무란다. 이를 계기로 마사루는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새 사람으로 거듭난다. 술도 끊고 만 3년 뒤 번듯한 생선가게의 사장으로 성장한다.

그해 12월 31일 남편 마사루가 처 앞에서 고개를 숙이며 눈물을 흘린다. 허황된 꿈을 버리고 자신을 다시 태어나게 해 준 아내에 대한 고마움에서다. 그러자 아내가 고백을 한다. “사실 당신이 지갑을 주운 건 꿈이 아니었어요.”

아내는 그 돈을 그냥 쓰게 되면 절도죄에 해당되는 걸 알고 바로 관청에 습득물로 신고한 것이었다. 에도(江戶)시대는 10량(요즘 가치로 약 30만 엔)만 가로채도 사형에 처해질 때다. 그러곤 부인은 살며시 남편 앞에 지갑을 내밀었다. 만 3년이 지나도록 주인이 나타나지 않자 이날 관청에서 ‘습득자’인 부인에게 지갑과 돈을 인계한 것이다. ‘거짓말’을 한 사실을 너그럽게 받아 준 남편에게 부인이 “오늘만 특별히…”라며 술을 한잔 권한다. 지갑을 앞에 놓고 기분 좋게 잔을 들이켜려던 마사루가 갑자기 잔을 내려놓는다. “그만둬야지. 또 꿈이 되면 안 되니까.”

12월 31일이다. 인간은 꿈을 꾸며 상상력의 날개를 편다. 때로는 망상이라고 비난을 받으면서도 말이다. 특히 상상이 현실과 멀어질수록 꿈은 커져 가고 기분은 좋아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언젠가 눈을 뜨게 되는 것이 꿈이다. 지난 5년간은 우리가 너무 꿈만 꿔 온 건 아닌지 모르겠다. 2008년 무자년(戊子年) 쥐띠 해에는 모두 허황된 꿈을 좇지 말고 눈을 부릅뜨고 살아 보자. 하지만 부디 오늘 밤 새해 첫 꿈만큼은 다소 허황돼도 좋으니 근사하고 신나는 꿈 꾸시길.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