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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든 유니폼 벗고 … 장외서 다시 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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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3월 13일 마지막 경기를 치른 김영만이 경기 종료 후 동료의 헹가래를받고 있다. [중앙포토]

 어찌 미련이 남지 않으랴마는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고, 또 새로운 시작이 있다. 축구의 최진철(36·전 전북), 배구의 신진식(32)·김상우(34·이상 전 삼성화재), 농구의 김영만(35·전 KCC), 야구의 임선동(34·전 현대), 조성민(34·전 한화). 올 한 해 정든 그라운드와 코트를 떠난 스포츠 스타들이다. 선수로서의 인생을 마친 이들은 이제 새로운 인생을 향한 준비에 들어가려 한다. ‘인생 이모작’이다.

◆더 나은 미래를 준비한다

배구 코트의 ‘갈색 폭격기’ 신진식은 김세진(KBS 해설위원)과 함께 1990년대 말~2000년대 초 한국 배구의 간판이었다. 성균관대를 졸업하고 96년 삼성화재에 입단해 겨울리그 9년 연속 우승의 주역이었던 신진식의 선수 인생에도 끝은 있었다. 올 6월 구단은 “더 늦기 전에 미래를 준비하는 게 좋겠다”며 은퇴를 권했다. 신진식은 “1년은 더 뛸 수 있다”고 버텼지만 결국 구단의 뜻을 받아들였다.

1m88㎝. 공격수로서는 작은 키지만 누구보다 열심히 뛰었고 누구보다 많이 뒹굴었다. 그랬기에 최고의 공격수인 동시에 최고의 수비수라는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겨울리그 최우수선수(MVP) 4회로 역대 최다 수상자다.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국제무대였던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에서는 후배들을 이끌고 프로 구기종목 유일의 금메달을 따냈다. 신진식의 ‘인생 이모작’은 지도자의 길이다. 지난달 호주 매쿼리대학으로 지도자 수업을 떠났다.

최진철은 98년 프랑스월드컵 직전 축구국가대표팀 훈련 멤버로 뽑혔지만 본선에는 가지 못했다. 그때 그의 나이 27세. 아무도, 심지어 그 자신도 4년 뒤 맞게 될 황금기를 짐작하지 못했다. 2002 한·일 월드컵을 앞두고 거스 히딩크 감독은 큰 키(1m87㎝)에 끈질기게 몸싸움을 하는 최진철을 발탁했다. 31세에 월드컵 무대를 처음 밟은 최진철은 세계적인 공격수들을 온몸으로 막아내며 4강 주역이 됐다. 2006년 독일 월드컵 직후 태극마크를 반납할 때까지 A매치(국가대표팀 간 경기) 65경기(4골)에 출전했다.

96년부터 프로축구 전북에서만 뛴 최진철은 K-리그 우승컵을 안아보지 못했지만, FA(축구협회)컵 우승팀 자격으로 지난해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정상과 클럽월드컵 무대에 섰다. 올 시즌 종료 후 은퇴를 결정한 최진철 역시 지도자의 길을 선택했다. 브라질과 유럽에도 6개월 정도씩 연수를 다녀올 계획이다.

장혜수 기자


◆갈 곳이 있어서 행복하다

1월 8일 동부 유니폼 대신 KCC 유니폼으로 갈아 입은 김영만은 3월 13일 KCC-동부전 4쿼터 막판 코트에 나섰다. KCC 이적 후 첫 출전이자 프로선수 김영만의 마지막 출전이었다. 95년 중앙대를 졸업하고 실업농구 기아차에 입단한 김영만은 97년 프로농구 출범 원년 기아의 우승 멤버다. 실업 시절 허재(KCC 감독)-강동희(동부 코치)-김유택(엑스포츠 해설위원)의 ‘허동택 트리오’는 그의 가세 이후 ‘허동만 트리오’로 간판을 바꿨다. 고교 시절 센터였던 김영만은 대학 입학 후 각고의 노력 끝에 포지션을 바꿔 ‘스몰포워드’의 대명사가 됐다. 매 시즌 평균 20득점의 공격력뿐 아니라, 강력한 대인 방어도 일품이었다. 1997~98시즌 베스트5 및 수비 5걸, 98~99시즌 베스트5, 2000~2001시즌에도 수비 5걸의 이력이 이를 말해 준다. 2001년 허리 부상 이후 내리막을 걸은 김영만은 ‘인생 이모작’을 고민하던 차에 모교인 중앙대로부터 코치 제의를 받았다. 김영만은 “선수로서보다 코치로서 더 뛰어나고 싶다.” 고 말했다.

삼성화재 센터 김상우는 1월 현대캐피탈전에서 블로킹 후 동료 최태웅의 발을 밟아 발목을 다쳤다. ‘이번이 마지막 시즌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은 현실이 됐다. 삼성화재와 국가대표팀에서 ‘좌(左)세진-우(右)진식’에 끼여 최우수선수(MVP) 한 번 받아보지 못했고, 병역 면제도 받지 못해 공익요원으로 근무했다. 그래도 ‘중(中)상우’가 없는 삼성화재와 국가대표팀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94년 성균관대 시절부터 태극마크를 단 그는 최고의 속공수로서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한국 배구를 아시아 정상에 올려 놓았다. 은퇴 결정 후 4개월간 두문불출했던 김상우는 11월 KBS 해설위원으로 변신했다. 불과 두 달. 깔끔한 마스크와 안정된 목소리, 조리 있는 해설로 기존 해설자들을 위협하고 있다.

성호준 기자


◆새로운 영역에 도전한다

프로야구 ‘황금세대’인 92학번 ‘빅3’ 투수는 임선동과 조성민, 그리고 정민철(한화)이었다. 동기인 ‘코리아특급’ 박찬호(34·다저스)는 고교와 대학 시절 ‘빅3’에 꼽히지 못했다. 그러나 임선동과 조성민은 10월 각각 현대와 한화에서 방출된 뒤 은퇴를 선언했다.

96년 당시 최고 계약금(7억원)에 아마추어 현대 피닉스에 입단한 임선동은 97년 LG에 입단했고, 프로 11년 만에 유니폼을 벗었다. 입단 첫해 11승을 기록하며 이름값을 했으나 98년부터 2년간 고작 1승에 그쳤다. 그러나 현대로 이적한 2000년 팀 동료 정민태·김수경과 함께 공동 다승왕(18승)에 올라 골든글러브를 받았다. 2001년 14승, 2002년 8승을 거뒀고 통산 52승(36패). 거기서 끝났다. 임선동은 은퇴를 결정한 뒤 “나를 이기지 못한 게 아쉽다”고 말했다. 그의 한 지인은 “계약금부터 각종 연봉·보너스를 경기도 용인 쪽 부동산에 투자해 지금은 수백억원대의 재산이 있는 것으로 안다”고 전했다.

96년 고려대 졸업 직후 일본 프로야구 요미우리로 직행한 조성민은 98년에 ‘굵고 짧은’ 황금기를 맞았다. 초반 15경기에 등판, 7승(6패)을 거뒀다. 그중 완봉승과 완투승이 3승씩이었고, 다승과 평균자책점(2.75)도 리그 1위였다. 그러나 올스타전 2차전 도중 팔꿈치 인대를 다쳐 재활과 재발을 반복하다 2002년 일본 생활을 마감했다. 이혼과 사업 실패가 겹쳤고, 자존심을 접고 참가했던 드래프트에서도 두 차례나 지명받지 못했다. 2005년 한화 김인식 감독의 부름을 받고 재기에 나섰지만 3년간 3승(4패)의 성적표만 남겼다. 조성민은 지인들에게 “지도자가 내게 어울리겠나. 야구에는 미련이 없다”는 심경을 털어놓았다. 일본에서 의류나 음식 관련 사업을 계획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김종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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