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 꼴통서 실용의 신보수로 진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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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이 좌에서 우로 이동하긴 했지만, 지금의 '우'는 과거의 '우'와는 다르다. 1970년대 산업화 세력이 그대로 재등장했거나, 권력이 민주화 이전 세대로 단순 회귀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이른바 신(新)우파의 등장이다. 이명박 당선자가 압도적 표차로 승리한 비결이 여기에 있다. 중도 세력과 진보 성향 유권자들까지 각종 도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이명박 후보에게 '비판적 지지'의 표를 던진 배경이기도 하다. 대선 과정에서 이회창 후보가 이명박 후보를 '가짜 보수'라고 공격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회창 후보의 공격은 이명박 후보의 중도적 성향을 강화해주며 오히려 지지층을 넓혔다.

87년 직선제 도입 이후 '비판적 지지'는 좌파 진영의 단골 메뉴였다. '비판적 지지'의 명분으로 진보 좌파 진영을 묶는 데 앞장선 이들은 좌파 성향 시민사회단체였다. 이번엔 이들이 조용했다. 무기력한 모습까지 보였다. 진보의 보루였던 대학 캠퍼스마저 잠잠했다. 반면 우파 시민단체는 활발했다. 그 중심에 2004년 말 태동한 뉴라이트(신우파) 운동이 있었다.

뉴라이트는 좌파에 대한 '가치 투쟁' '담론 투쟁'을 선도했다. 지난 시절 이념 투쟁은 대개 좌파가 공격하고, 우파는 방어를 했다. 예컨대 진보 좌파가 '민주화' '민족 통일' 같은, 누구도 쉽게 거부하기 힘든 이상적 가치를 전면에 내세우며 몰아붙일 때 대개 우파는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뉴라이트 혹은 신우파는 달랐다.

"산업화.민주화를 넘어 선진화로 가야 합니다. 이것이 저에게 요구되는 새로운 시대정신입니다."

이명박 당선자가 20일 첫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던진 화두다. '건국→산업화→민주화→선진화'라는 공식으로 요약되는 이 화두는 간단해 보이지만, 이 간략한 공식이 나오기까지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우여곡절이란 우파의 절치부심이다. 두 차례 대선에서 연패한 2002년 무렵 우파에겐 앞날이 없어 보였다. 386 세대의 지지를 받는 진보 정권이 향후 20년은 유지될 것이란 전망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긍했던 시절이다.

거의 바닥까지 내려갔을 무렵, 비로소 우파 내에서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동안 산업화의 주역이라는 자부심이 지나쳤음이 우선 반성의 요소로 꼽혔다. 국민의 소리를 무시했던 오만과 부패와 비리도 반성의 도마에 올랐다. 게다가 민주화의 가치도 소중한 것이라는 새로운 인식이 확산됐다. 이 상황에서 산업화와 민주화의 가치를 모두 인정하고 내놓은 개념이 바로 선진화다.

뉴라이트는 좌파의 존재를 인정한다. 서민 복지를 말하거나, 사회개혁의 목소리를 내는 이를 '빨갱이'라 단죄했던 관행을 끊었다. '합리적 좌파'와는 국익을 위한 대화를 할 수 있다는 전향적 선언이었다. 이 같은 우파의 변화를 뉴라이트가 주도했다.

좌파에 대한 뉴라이트의 역공은 세계화의 물결을 타고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발돋움했다. 우파의 잘못을 반성하고, 좌파의 존재도 인정한 후 한걸음 더 나아가 선진화란 새 무기로 좌파를 압박하고 나섰을 때 좌파는 속수무책이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선진화론 밑에는, 대선 패배를 더 이상 반복할 수 없다는 절실함이 녹아 있었다. 세계화 시대 새 시대정신인 '실용 보수'의 길을 선점했다는 자부심은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렇기에 좌파로부터의 집요한 도덕성 시비에도 위축되지 않고 전진할 수 있었다. 좌우파 간 소모적 정쟁에 신물을 내던 국민 입장에서 뉴라이트 운동은 신선하게 다가왔다.

이명박 후보는 뉴라이트의 선진화 개념을 자신의 집권 지표로 전격 수용했다. 첫 기자회견에서 "화합 속에 변화를 추구하고, 신 발전체제를 열겠다"고 선언한 것은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뉴라이트 진영은 이명박 후보를 전폭 지지했다. 경제, 남북관계, 외교, 교육 등 핵심 분야에서 기존의 좌우파 이념을 뛰어넘는 21세기 '실용 보수'의 길이 기대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번 선거에서 좌파의 퇴조 원인은, 우파의 반성을 뛰어넘는 질적인 변화를 보여주지 못한 데서 찾을 수 있다.

◆왜 신우파인가="건국 이래 대한민국의 제4막이 새로운 보수의 주도로 열리고 있다. 이념과 정책에서 신우파는 과거 보수와 상당히 다르다."(신지호 자유주의연대 대표)

제4막이란 건국.산업화.민주화에 이은 선진화 시대를 가리킨다. 신 대표는 이 당선자를 '21세기 우파'로 규정하며 "20세기 구(舊)우파가 반공을 국시로 하는 반공주의, 민주주의를 제약했던 권위주의, 그리고 경제 운영에 있어서 국가개입주의.관치경제였던 것과 다르다"고 말했다.

21세기 우파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원칙을 중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잇따른 도덕성 시비에도 불구하고 중도와 진보 세력, 그리고 전 세대에 걸친 광범한 지지를 받을 수 있었던 것으로 설명된다.

"이명박 정권은 시장중심체제로 가되 기본적인 복지정책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대북관계에서도 상호주의가 강화되겠지만 햇볕정책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장훈 중앙대 교수)

"신우파란 과거의 보수 이미지를 벗었다는 의미다. 이번 대선에서 대북 강경정책이라든가, 반공 이데올로기 같은 과거 보수의 부정적 이미지는 이회창 후보가 가져갔다."(강원택 숭실대 교수)

이명박 정권의 탄생이 이념적으로 복합성을 띠고 있다고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임혁백 고려대 교수는 "이명박 당선자는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상당히 실용주의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보인다"며 "단순히 보수로의 이동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말했다.

◆기대.우려 교차=나성린 한양대 교수는 "신우파는 기존의 우파와 같이 시장경제 원리를 존중하지만, 시장 실패가 있을 때 정부가 조금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복지나 분배를 위한 정책에 조금 더 신경 쓰는 것이 특징"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우파와 구분되는 이념 지형 속에 선출된 이명박 당선자지만, 그의 이미지는 다시 '경제 대통령'으로 단순화된다. 좌우 이념을 떠나 먹고사는 경제의 문제가 핵심 현안으로 부각됐고, 여기엔 수많은 국민의 요구가 그만큼 절실하게 담겨 있다. 강점은 약점으로 변화하게 마련이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지점이다.

"현재 4~5% 이상 성장률에도 양극화가 심한데, 7% 성장한다고 양극화 구조가 바뀌겠는가."(장상환 경상대 교수)

"경제 성장률이 5% 수준에 머물거나 이하로 떨어지면, 경제 성장을 주요 정치적 정당성으로 내세워 당선된 이명박 정권은 공격받을 가능성이 있다."(송호근 서울대 교수)

송 교수는 "압도적 승리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안한 영광'"이라고 했다. 새로운 여행은 시작됐는데 길은 잘 보이지 않는다고도 했다. 그는 "집권 정당성의 자원을 경제 성장이라는 하나의 요소로부터 두세 가지로 분산시키면서 국민의 지지를 끌고 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장상환 교수는 "성장을 중시하더라도 다양한 의견을 종합하고, 때에 따라서는 참여정부의 주요 인사들을 흡수해 기용하는 것도 생각해볼 만하다"며 "영국 보수당이 복지를 포기하지 않았듯이, 오히려 보수당이기 때문에 부담 없이 복지정책을 추진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기대했다.

"보수 정권이 생명력을 가지려면 경제적 부가가치의 정치만을 추구해서는 곤란하다. 그것은 당연한 것이고, 그것을 뛰어넘는 새로운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것"(김일영 성균관대 교수)이란 조언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김병국 고려대 교수는 "보수.진보 양 진영으로부터 모두 표를 받아 놓고 한쪽을 잊는다는 것은 안될 일"이라며 "보수.진보라는 구분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이 세운 목표, 국민들이 공감하는 목표에 전념해줬으면 한다"고 당부했다.

배영대.강승민.김호정.이에스더 기자

◆도움말 주신 분=강원택(숭실대 정치학).김병국(고려대 정치학).김일영(성균관대 정치학).김형기(경북대 경제학).김형준(명지대 정치학).나성린(한양대 경제학).박명림(연세대 정치학).송호근(서울대 사회학).신지호(정치학 박사, 자유주의연대 대표).윤평중(한신대 철학).임혁백(고려대 정치학).장상환(경상대 경제학).장훈(중앙대 정치학) 교수 (이상 가나다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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