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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책갈피] 화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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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초상화 살인
이언 피어스 지음, 김흥숙 옮김
서해문집, 232쪽, 8900원

썩 내키진 않지만, 서로의 존재를 어쩔 수 없이 필요로 하는 관계. 그래서 ‘악어와 악어새’로도 비유되는 것이 예술가와 비평가다. 그 고통스러운 공생의 방정식을 미스터리 기법으로 다뤘다.

지은이 이언 피어스는 이미 『핑거포스트』『스키피오의 꿈』등으로 국내에 적지 않은 팬을 갖고 있는 작가. 박사학위를 받은 전공인 서양미술사에 대한 해박함은 이 작품에서도 유감 없이 과시된다. 보통 600쪽이 넘는 다른 작품들과 달리 분량도 적어 부담 없다. 2005년 출간됐을 때 ‘이언 피어스의 책을 손가락 두 개로 들 수 있다니 놀랍다’는 평이 나왔다고 한다.

이 소설은 화가 헨리 맥알파인이 벗이자 저명한 비평가인 윌리엄 나스미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그에게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둘 사이에는 두 명의 여인이 얽혀 있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그림을 위해 기꺼이 가난을 택한 에블린, 그리고 창녀이자 그림 모델인 재키다.

배경은 프랑스 인상주의가 미술세계를 뒤흔든 19세기 말 유럽. 인정받고 싶은 욕망에 불타는, 그러는 새 어느덧 속세의 때가 묻어버린,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정성이 담긴 그림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연약한 영혼의 소유자들이 미술사의 격동기를 수놓는다.

제목에 암시돼 있듯 친구의 초상화를 그리는 과정은 살인으로 가기 위한 준비 단계다. 면식범의 살인 동기가 대개 그렇듯, 맥알파인 역시 분노에 사로잡혀 있다. 지식은 많을 지 모르나 예술가에 대한 애정은 눈곱 만큼도 없는 비평가에 대한 화가의 분노가 주옥 같은 대사 속에 드러난다.

“비평가는 끝없이 요구하는 신이지. 끝없이 달래야 하는 신 말이야. 공물을 바치고, 또 바치고, 또 바쳐야 하지” “(작품 평을) 처음엔 믿을 수 없어 하고 점차 그만 읽고 싶어하다가 결국은 끝까지 읽고 싶은 욕구에 이끌리거든. 단어 하나하나, 은유 하나하나, 경멸적인 표현 하나하나가 읽는 사람을 집어삼키면서 고통은 점차 가중되지” “화가와 비평가의 관계는 보통 남자와 거세된 남자의 관계와 같다는 말이 있지”.
 
부디 마지막 문장 하나까지 놓치지 마시길. 런던을 떠나 부르타뉴 앞 바다의 외딴 섬에 정착한 화가의 비밀이 숨어 있으니까. 인간 사회를 떠도는 열정과 위선이 이만큼 적나라하게 묘사된 작품도 많지 않을 듯싶다.

기선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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