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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아 기념도서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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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내게는 밍크도 없고 재규어도 없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값비싼, 패리스 힐튼에게도 없을 고가의 애완물, 사전식 표현대로 하면 ‘사랑하고 좋아하여 가까이 두고 즐기는 것’을 얼마 전 발견했다. 자그마치 50억원짜리인 그것. 유학 중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책을 너무나 좋아했던 딸을 위해 아버지가 지어 서울 서대문구에 헌납한 ‘이진아 기념도서관’이다.

딸을 잃은 아버지의 애끓는 부정이 서려서일까. 독립공원 뒤편에 위치한 도서관은 더없이 아름답고 정갈하고 사려 깊다. 독서보다는 보통 학생들의 시험공부 장소가 되는 자습실을 없앤 데다 콘크리트가 아닌 나무를 깐 갈색의 바닥은 조용한 서재의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소장도서는 적지만 그 아담한 규모가 오히려 큰 도서관에서라면 아예 가 보지도 않았을 분야의 책들까지 오며 가며 한 번쯤 뽑아 들게 만든다. 거기에다 개가식 열람실의 개방시간이 오후 10시까지다.

근무자들을 생각하면 마냥 좋다고만 말하기가 조심스럽긴 하다. 하지만 다른 도서관에서라면 대개 가방 싸느라 허둥대야 하는 해질녘의 풍경을 책을 펼쳐 놓은 채 커다란 통 유리창 너머로 여유 있게 감상할 수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이라는 마법의 시간으로 들어가는 해질녘은 사람 마음을 어딘지 좀 서글프게 한다. 겸허한 마음이 될뿐더러 석양의 서정은 마음을 가장 예술적이고도 창조적이 되게도 한다. 도서관이야말로 책과 더불어 그런 시간과 풍경을 찬찬히 누리게 해 주면 좋겠다고 자주 생각했었는데 이 도서관이 딱 그런 도서관인 것이다.

그러니 석양 감상의 끝에는 늘 얼굴 한 번 뵌 적 없는 분의 덕을 이렇게 크게 누리니 나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들을 위해 뭐든 좋은 일을 하고 살아야지 하는 뜨거운 반성과 다짐을 하게 된다. 돈이란 쓰기에 따라서 얼마나 커다란 기여고 미덕일 수 있는가도 새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서 이 도서관은 도서관 건물 자체의 내력과 구조와 풍경까지도 인생에 대한 새로운 통찰과 성숙을 일깨워 주는 곳이라 감히 말하고 싶다.

며칠 전 그곳에서 읽은 베토벤의 편지와 유서 글이 기억에 남는다. 이제 겨우 대여섯 곡을 작곡했을 뿐인 25세의 베토벤은 친구인 의사 베겔러와 형제들에게 ‘하일리겐슈타트의 유서’라고 불리는 편지를 쓴다. “나의 청각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네. 자주 나는 절망에 빠지곤 해. 사람들과 가까이할 때면 내 비참한 상태가 알려질까 봐 몹시 불안해진다.” 절망적인 토로가 가득한 편지였다. 그러나 그는 그 유서 편지 이후 오히려 대표작의 대부분을 썼다. 절망과 비참을 극복한 예술처럼 인간에게 영원한 위안과 격려가 되는 게 또 있을까.

그런가 하면 정현종 시인을 몇 년 만에 다시 접한 곳도 이 도서관에서였다. ‘헤게모니는 꽃이 /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 헤게모니는 저 바람과 햇빛이 / 흐르는 물이 /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인생의 실권(實權), 헤게모니를 늘 무엇에 맡겨 왔으며, 무엇에 맡길 것인지를 새삼 생각하게 한다. 절망과 비참과 실망과 가난에 지지 않는 마음에, ‘우리들의 저 찬란한 덧없음이 잡아야 하는 거 아니에요?’ 하는 무욕의 마음에, 무엇보다 시끄럽고 허황되며 거짓되기 쉬운 말이 아니라 고요하고도 빼어난 글에, 그런 글들이 가득한 도서관에 헤게모니를 계속 맡길 수밖에. 내년에도 이런 멋진 도서관을 자주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김경미 시인·방송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