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후반 작곡하고 있는 필자
나원화 선생은 우리나라 초창기 안과 의사로 의학계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는 분이다. 하지만 그는 나의 전통가곡 선생이기도 하다. 대학 재학 중 3년쯤 되는 기간에 나는 나 선생을 찾아 다니며 노래를 배웠다. 과학의 원리로 음악을 연구할 만큼 그는 학구열이 강한 사람이었다. 한번은 피아노 두 대를 구입한 후 몸체를 완전히 분해하고 다시 조립한 일도 있었다.
“악기가 생겨먹은 구조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랬지.” 의사가 음악을 좋아하니 이렇게 특이한 일까지 일어난 것이다.
내가 나 선생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 때문이었다. 나현구라는 친구는 학교에 다닐 때 밴드부원으로 활동했다. 음악적 소질이 많았던 이 친구는 국악기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울 때 현구도 내 뒤를 좇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소금. 함께 음악을 하던 그는 “사실 나의 아저씨 되는 사람이 국악을 한다”고 슬쩍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도 그렇게 국악을 좋아하면 한번 만나보는 게 좋겠어.” 그 말에 나는 나 선생의 집을 찾았다.
나는 그에게서 남창 가곡 전 바탕을 배웠다. 선비들이 즐기던 노래인 가곡은 시조를 텍스트로 해서 부른다. 우리나라 국악 중에서 남창과 여창의 구분이 확연하게 돼있는 장르는 가곡뿐이다. 나 선생은 전통적인 악보인 정간보로 대충 그려져 전해지던 가곡의 악보를 서양식 오선보로 세밀하게 옮겨 나를 가르쳤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교육법이었다.
나 선생은 내 국악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1962년 서울대 국악과 강사로 일하면서 내가 한 일 중 중요한 것이 가야금 정악과 산조를 오선보로 옮긴 것이었다. 국악교육도 입으로 전달해 가르치고 배우던 도제식 교육의 시대에서 학교 교육의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재가 필수적이었다. 이때 나 선생의 오선지 채보법이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또 내가 62년에 처음으로 작곡한 작품도 가야금 곡이 아니라 가곡이다. 내가 평소 좋아했던 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가곡으로 만든 동명의 곡이다. 이 가곡을 작곡할 때 나 선생에게 배웠던 가곡의 어법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곡에 대한 반응은 좋았다. 나는 당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 백낙청에게 이 곡을 녹음해 보내줬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 박사과정에 있었는데, 이 테이프를 들어보기 위해 자료실에 들어가려다 자료실장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포에트리 룸(poetry room)’이라 이름 붙은 이 곳에서는 시 낭송이 녹음된 테이프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사를 모두 영어로 번역해 들이밀며 그 실장과 나의 음악을 같이 들었다고 한다. “그 미국인도 이 곡을 무척 좋아하더라”는 것이 백낙청의 전언이다. 백낙청이 영역한 ‘국화 옆에서’는 훗날 나의 앨범 3집의 속지에 그대로 실렸다.
황병기<가야금 명인>가야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