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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오동 천년, 탄금 50년 38. 전통가곡과 오선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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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1960년대 후반 작곡하고 있는 필자

“의사는 일종의 과학자 아닌가. 음악도 체계적으로 공부하려면 과학적 지식과 분석이 필요한 것이다.”

나원화 선생은 우리나라 초창기 안과 의사로 의학계에서 상당한 평가를 받는 분이다. 하지만 그는 나의 전통가곡 선생이기도 하다. 대학 재학 중 3년쯤 되는 기간에 나는 나 선생을 찾아 다니며 노래를 배웠다. 과학의 원리로 음악을 연구할 만큼 그는 학구열이 강한 사람이었다. 한번은 피아노 두 대를 구입한 후 몸체를 완전히 분해하고 다시 조립한 일도 있었다.

“악기가 생겨먹은 구조를 알아보기 위해서 그랬지.” 의사가 음악을 좋아하니 이렇게 특이한 일까지 일어난 것이다.

내가 나 선생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 동창인 친구 때문이었다. 나현구라는 친구는 학교에 다닐 때 밴드부원으로 활동했다. 음악적 소질이 많았던 이 친구는 국악기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울 때 현구도 내 뒤를 좇았다. 그가 선택한 것은 소금. 함께 음악을 하던 그는 “사실 나의 아저씨 되는 사람이 국악을 한다”고 슬쩍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너도 그렇게 국악을 좋아하면 한번 만나보는 게 좋겠어.” 그 말에 나는 나 선생의 집을 찾았다.

나는 그에게서 남창 가곡 전 바탕을 배웠다. 선비들이 즐기던 노래인 가곡은 시조를 텍스트로 해서 부른다. 우리나라 국악 중에서 남창과 여창의 구분이 확연하게 돼있는 장르는 가곡뿐이다. 나 선생은 전통적인 악보인 정간보로 대충 그려져 전해지던 가곡의 악보를 서양식 오선보로 세밀하게 옮겨 나를 가르쳤다.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교육법이었다.

나 선생은 내 국악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다. 1962년 서울대 국악과 강사로 일하면서 내가 한 일 중 중요한 것이 가야금 정악과 산조를 오선보로 옮긴 것이었다. 국악교육도 입으로 전달해 가르치고 배우던 도제식 교육의 시대에서 학교 교육의 시대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러한 교재가 필수적이었다. 이때 나 선생의 오선지 채보법이 큰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또 내가 62년에 처음으로 작곡한 작품도 가야금 곡이 아니라 가곡이다. 내가 평소 좋아했던 시,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를 가곡으로 만든 동명의 곡이다. 이 가곡을 작곡할 때 나 선생에게 배웠던 가곡의 어법을 이용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 곡에 대한 반응은 좋았다. 나는 당시 미국에서 공부하고 있던 친구 백낙청에게 이 곡을 녹음해 보내줬다. 그는 하버드대학에서 영문학 박사과정에 있었는데, 이 테이프를 들어보기 위해 자료실에 들어가려다 자료실장에게 붙잡혔다고 한다. ‘포에트리 룸(poetry room)’이라 이름 붙은 이 곳에서는 시 낭송이 녹음된 테이프만 들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가사를 모두 영어로 번역해 들이밀며 그 실장과 나의 음악을 같이 들었다고 한다. “그 미국인도 이 곡을 무척 좋아하더라”는 것이 백낙청의 전언이다. 백낙청이 영역한 ‘국화 옆에서’는 훗날 나의 앨범 3집의 속지에 그대로 실렸다.

황병기<가야금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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