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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중 선체’ 사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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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주영 ‘조선(造船) 신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것이 500원짜리 거북선 지폐로 거액의 해외 차관을 받아낸 ‘거북선 펀딩’ 일화다. 이걸 도입부라고 한다면 도크를 지으며 배 엉덩이부터 만들기 시작한 ‘거꾸로 공법’은 대미에 해당한다. 현대조선은 이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로 1972년 3월 울산 허허벌판에 조선소 빔을 박기 시작한 지 2년3개월 만에 26만t짜리 배를 그리스 선주에게 인도했다. 세계 최단 기록을 낳은 이 ‘빨리빨리’ 근성은 무리를 빚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 손으로 세운 대형 유조선은 1인당 국민소득 수백 달러에 불과한 나라 국민에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상징이 됐다.

요즘 ‘조선 한국’의 약진은 눈부시다. 현대중공업부터 우리 업체 순위를 매기면 곧바로 세계 랭킹이 된다. ‘빅 3’를 비롯해 세계 10위 내 업체가 6, 7곳에 달한다. 유조선을 비롯한 탱커는 조선 최강국으로 도약하는 데 줄곧 든든한 밑천이 됐다. 특히 최악의 유조선 재앙으로 기록된 89년 미국 엑슨 발데스 호의 알래스카 연안 좌초 사고가 한창 뻗어 나던 우리 조선업계에 기회가 됐다는 사실이 흥미롭다. 두 겹 선체가 의무화되면서 유조선 대체 수요가 크게 일었다. 현대가 국내 처음으로 2중 선체 유조선을 만든 것이 91년. 그로부터 10여 년 만에 대우조선은 세계 최대 규모인 45만t급 2중 선체 유조선을 건조했다.

반도체·자동차와 더불어 조선을 우리 간판 수출 산업으로 키운 유조선이 서해안에 ‘기름 폭탄’을 쏟아 부었다. 사고 선박이 재래식 단일 선체 구조라 피해가 더 컸다곤 하지만 불운 탓만 하기엔 찜찜한 구석이 많다. 피해 관측과 초동 대처, 정보 공유, 지휘 체계 할 것 없이 위기관리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비판이다. 방재 당국은 정교한 재난 대응 매뉴얼을 갖췄다고 주장하지만 허둥지둥하다가 피해를 키운 95년 전남 여수 시프린스 호 사고 때보다 나아진 게 뭐냐는 힐난도 나온다.

때마침 미국해안경찰(USCG)이 도와 주겠다고 나섰다. 알래스카 기름 유출 사고 같은 대재앙을 체험하며 세계 최고의 방재 노하우를 갖추게 된 정예 요원들이지만 고마운 한편 부끄럽기도 하다. 경제가 커지면 천재지변과 인재(人災)도 대형화한다. ‘안전 -한국!(Safe-Korea!)’이 헛구호에 그치지 않으려면 한국 조선업의 앞선 ‘2중 선체’ 기술을 국가 위기관리 시스템에 한번 도입해 보면 어떨까 싶다.

홍승일 경제부문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