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황세희의몸&마음] 알코올 경계경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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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사람이 죄 있나, 과음한 탓이지….”

 전날 밤, 술주정하는 남편에게 흠씬 맞고 드러누운 S씨(45)는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린다.

 몇 년 전 사업 실패 후 시작된 남편의 술주정은 만취해 귀가하면 물건을 집어던지고 폭언하는 걸로 시작해 이를 말리는 S씨를 구타하는 걸로 끝난다. 하지만 남편은 이튿날 술에 깨기만 하면 “다시는 안 그러겠다”며 용서를 빌고 S씨가 이를 수용하는 일이 이제껏 반복된 것이다.

 술주정은 의학적으로 알코올이 뇌세포에 과량 흡수돼 발생하는 ‘급성 알코올 중독’ 증상이다.

 알코올은 한두 잔 마시는 정도로 소량 흡수되면 중추신경계가 흥분돼 기분이 들뜨고 자신감이 커지면서 해방감을 느끼게 한다. 하지만 이 단계 이후에도 계속 마시게 되면 대뇌피질과 망상계를 자극해 사고력·판단력·기억력·주의력·정보 처리·능력 언어 능력·반응 시간·운동 기능 등에 장애가 초래된다. 맨정신일 때 가능했던 자제력과 상황 판단 능력은 떨어지는 반면 충동성·공격성·초조감 등은 증가하는 것이다. 개인 차가 크지만 통상 폭탄주 5잔, 와인 한 병, 맥주 2병 이상 마시면 술주정이 나올 수 있다.

 술주정은 혀 꼬부라진 말투,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를 발단으로 점차 감정 기복이 심해지면서 시비나 언쟁을 하다가 격한 행동으로 이어지기 쉽다. 실제 맨정신으로는 금기시하는 음주 운전·폭력·자살 등의 빈도가 과음 후 급증한다. 자동차 사고로 인한 사망자의 절반 이상이 음주운전 탓이며, 모든 살인사건의 절반 이상이 술 취한 상태에서 일어난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다.

 물론 술에 취한 사람 모두가 ‘술김에’ 주정을 하는 것은 아니다. 알코올에 대한 반응은 사람마다 차이가 커 술을 조금만 마셔도 주정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이 마셔도 행동이 평상시와 별반 차이가 없는 사람도 있다. 인간의 뇌는 술기운이 오르면 ‘술을 자제하라’는 신호를 내보내는데 술주정은 이 기능에 문제가 있어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기 때문이다.

 또 술에 취했다고 해서 평상시 마음속에 없던 말이나 행동이 나오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취중진담(醉中眞談)이란 말처럼, 술 취한 상태에서 마음속 진실을 내보이기 쉽다. 술주정 때 표현되는 말과 행동은 평상시 내재해 있던 인격과 행동이 한층 강화돼 나타나는 셈이다. 취중 실수(?)에 대해 의학적 면죄부를 줄 수 없는 이유다.

 S씨 남편처럼 반복되는 술주정은 1년 이상 지속적인 약물치료·정신치료를 받지 않고선 호전되기 힘든 정신질환으로 봐야 한다.

 술주정 치료는 자신의 주량을 알고 절대 그 이상은 안마시는 데서 출발한다. 주량이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술의 양’ 이다. 예컨대 소주 2잔 마실 때까지 자제가 가능하다면 늘 그만큼만 마셔야 한다. 또 술주정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술 좌석에서 주변에 본인의 주량을 밝히고 더 이상 권하지도 마시지도 못하도록 협조를 구해야 한다.

 술 권하는 12월, 월초부터 유명 기업체 회장의 기내 술주정이 논란 끝에 결국 사법처리 결정이 내려졌다. 가정과 사회에서 술주정 피해를 줄이려면 술좌석에서 서로 간의 주량을 확인하고 자제시키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황세희 의학전문기자·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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