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밉보이면 돈줄 끊겨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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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농협중앙회 취재 과정에서 회원조합 관계자의 입을 열게 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중앙회 이야기만 꺼내면 "문제가 있는 것은 맞다"면서도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며 입을 다물었다.

어렵사리 입을 연 한 조합 관계자는 "정부의 농업정책 자금을 집행하는 곳이 바로 중앙회인데 거기에 밉보이면 자금지원을 받을 수 없다"고 사정을 털어놨다. 어느 조합에 얼마의 자금을 줄지 결정할 권한이 중앙회에 있으니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중앙회가 일선 조합을 지원하는 무이자.저리자금 규모도 상당하다. 그는 "중앙회 개혁에 10년이 걸릴지 20년이 걸릴지 누가 알겠습니까. 괜히 앞장섰다간 겨우 일으킨 사업만 망치게 될 겁니다"라며 한사코 익명을 요구했다.

농협중앙회 개혁은 오래된 주제다. 정권마다 초기에는 개혁을 장담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없던 일로 됐다. 그러면서 농협중앙회의 방만 경영은 도를 더해 갔다. 일선 조합의 손으로 뽑은 3명의 농협중앙회장이 뇌물수수나 횡령으로 잇따라 사법처리돼도 농민들은 농협개혁에 나서길 꺼렸다.

농협중앙회는 "우리는 정부가 정책자금을 어디다 쓸지 결정하면 그대로 집행하는 단순한 창구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또 "공직 유관단체가 아니라서 국정감사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이와 다르다. 100조원이 넘는 농업지원금을 틀어쥐고 있던 곳이 바로 중앙회다. 앞으로도 100조 가까운 돈이 더 지원될 예정이다.

농협중앙회가 금융업으로 돈버는 것을 문제 삼자는 게 아니다. 농협 금융의 경쟁력은 계속 키워줘야 한다. 문제는 농협이 '농민 지원 기관'이라는 보호막 아래 조직 이기주의로 치닫는다는 점이다. 그렇지 않다면 중앙회의 진짜 주인인 240만 농민의 사정은 어려워지고, 젊은이들은 농촌을 떠나는 현실을 설명할 길이 없다.

기사가 나간 뒤 '농협 울타리에서 일하는 한 평범한 직장인'이 e-메일을 보내왔다. 그는 "농협은 돈만 많은 조직, 주인이 없어 잘릴 일 없고, 조금씩 해먹어도 안 잘리는 조직"이라며 "농협이 농민 권익을 보호한다는 건 소가 웃을 일"이라고 했다. 농업을 살리려면 농협이 달라져야 한다. 다음 정권만큼은 농협개혁을 우선과제로 삼을 것을 주문하고 싶다.

박혜민 경제부문 기자